이방주
수필가

[충청매일] 상당산성은 유사시에 관아는 물론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보민(保民) 산성이다. 청주읍성이 있으나 청주읍성이 위험할 때 와우산토성으로 피했다가 상당산성으로 피할 수 있는 보민용 산성이다. 그래서 청주읍성을 내성이라 한다면 당산토성, 와우산토성, 상당산성으로 이어지는 산성의 고리를 청주 나성(羅城)이라 하고 싶다. 아니 청주나성이다. 나성이란 도시의 바깥쪽을 둘러싼 방어용 성을 의미한다.

1728년 조선 경종의 뒤를 이어 연잉군이었던 영조가 즉위하였다.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 정권이 축출되고 영조를 지지한 노론 정권이 세력을 잡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인좌는 반란군 대원수가 되어 1728년 충청병사 이봉상을 죽이고 청주성을 함락시켰다. 이인좌는 청주성의 배후산성인 상당산성까지 손에 넣었다. 반란군은 황간·회인·청안·목천·진천을 차지하고 창고를 열어 백성에게 관곡을 나누어주고 죄인들을 석방하고 하층민을 규합하여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반란군은 영남 호남에서 패하였으나 도성을 향하여 진천, 안성, 죽산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3월 24일 안성·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되어 이인좌는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그래서 결국 청주읍성과 여기 상당산성이 한때 반란군의 휘하에 들어가기도 했었다. 이인좌의 난으로 영조는 인사정책을 새롭게 바꾸고 제도를 개선했다고 하니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킨 목적이 자신의 영달이 아니라 진정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면 지옥에 가서도 빙그레 웃었을 것이다.

공남문으로 올라가는 오른쪽에 비석이 하나 있는데 ‘무신창의사적비(戊申倡義事蹟碑)’이다.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킨 1728년이 무신년이기에 무신년 반란에 청주 지방 유생 14명이 목숨을 걸고 청주읍성과 상당산성을 지킨 미덕을 기리기 위해 지역 후학 유생들이 세운 기념비이다.

상당산성 공남문은 산성 공부하기 좋은 산성 교실이다. 여기서 상당산성이 우리나라 보민 산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우선 성문은 홍예문으로 되어 있다. 홍예문은 무지개 모양 성문을 의미한다. 견고한 대리석으로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석문을 지어 냈을까 감탄한다. 문에 들어가기 전에 오른쪽에 치성(雉城)이 있다. 치성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치성은 본래의 성벽에서 일부 성벽을 직각으로 밖으로 돌출시켜 쌓아서 외부에서는 공격이 어렵고 내부에서는 양방향에서 쉽게 방어하려는 지혜로운 축성법이다. 치성은 왼쪽으로 성위 길을 걸으면서 올라가면 바로 또 있고 서남암문에도 있다.

성문을 들어가면서 천장을 보면 두꺼운 널빤지로 되어 있다. 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성문이 열렸을 최후의 순간에 누각 위에서 널빤지를 하나씩 걷어내면서 문을 밀고 들어오는 적에게 뜨거운 물세례를 할 수도 있고 기름을 끓여 부을 수도 있다. 갖가지 공격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성문의 양쪽 벽을 보면 커다란 구멍이 있는데 이곳은 장대로 가로 막는 시설이다. 설사 성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더라도 적은 안심할 수 없다. 문안에 옹성이 있어서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방어군으로부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성 안에 있는 옹성을 내옹성이라 한다. 옹성은 대개 성문 밖에 성문을 에워싸고 쌓은 둥그런 성벽이다. 전차의 공격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고 문에 다가오는 적을 사방에서 공격할 수 있다. 밖에 있을 때 매우 효과적이지만 상당산성 공남문은 밖의 지형적인 특징으로 옹성이 크게 필요하지 않으니 내옹성을 마련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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