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제대로 된 땅 한 뼘 없는 장회에 임방을 만든 것은 순전히 임구학의 수완에 의한 것이었다. 임구학은 조상들이 대대로 어디에 살았는지 자신의 관향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임구학이 알 수 있는 윗대는 할아버지까지가 전부였다. 어디로부터 흘러왔는지는 모르지만 임구학이가 기억하는 고향은 섬밭골이었다. 장회는 한 뼘 땅도 귀하지만 섬밭골은 아예 땅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제비봉 큰 줄기가 양당 쪽으로 뻗어 내리며 여러 산줄기를 낳고 그 중 한 줄기가 고평으로 휘돌아 치며 또다시 수많은 갈래와 골짜기를 만들고 있는데, 백두대간 주능선에서 벗어난 곳이라 산이 높지는 않으나 골이 깊어 잘못 들어갔다가는 헤어나올 수 없는 곳이 이곳이었다. 그런 깊은 골짜기 중에 한 곳이 섬밭골이었다. 임구학이 태어난 곳이었다. 임구학이 어려서부터 본 것은 하늘과 나무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런 산 속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화전을 일궜다. 깊은 골짜기다보니 변변한 화전도 일구지 못했고, 무엇을 심어 뭐를 먹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그 산중에서도 고기를 자주 먹었다는 것이었다. 날이 덮고 숲이 우거진 철에는 혹간이었지만, 날이 추워지고 낙엽이 몽땅 덜어져 숲이 훤해지는 겨울에는 고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눈이 첩첩이 쌓인 날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신새벽부터 창을 들고 집을 나섰다. 저녁이 되어 돌아오는 두 분의 어깨에는 어김없이 사냥한 짐승이 있었다. 겨우내 두 분이 하는 일은 사냥과 가죽을 다듬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가죽을 팔러 나가는 일이었다. 가죽을 팔러 출타할 때는 며칠씩 두 분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장이 열리는 멀리까지 다녀오느라 그런 것 같았다. 그래도 두 분이 집으로 돌아오는 날은 신세상이 따로 없었다. 두 분의 지게에는 겨울을 날 양식과 이제껏 구경도 못했던 신기한 것과 먹을 것들이 실려 있었다. 임구학이 섬밭골에 살며 자연스럽게 사냥꾼이 된 것도 그런 기억들이 컸다.

장회로 나온 것은 임구학이 전적으로 살림을 맡으면서부터였다. 산 즐기다 호랑이 물려가고 물 즐기다 고기 밥 된다는 말처럼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산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호랑이에 물려 그리 된 것은 아니었다. 두 분은 산을 즐기는 것도 사냥을 즐긴 것이 아니었다. 산중에서 먹고 살 길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러니 살기위해 산을 타야했고 산중에 사는 짐승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도 두 분은 먹고살기 위해 산으로 사냥을 갔다가 눈에 홀려 얼어서 객사했다. 임구학의 나이 열대여섯 살 무렵이었다. 어려서부터 그 나이가 되도록 삼밭골에서 두 분이 하는 일을 보고 자랐으니 다른 일은 본 일도 없고 할 줄도 몰랐다. 자연스럽게 임구학 역시 화전을 일구는 일과 사냥을 하게 되었다. 당장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임구학이가 최풍원을 만난 것은 그 때였다. 가죽을 팔기위해 청풍장에 나갔던 임구학이 다른 장사꾼이 다리를 놓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임구학도 식구들을 먹이려면 손질해놓은 가죽을 팔아야 했고, 최풍원 역시 한참 장사를 넓혀가던 때에 값나가는 가죽을 선점하는 것은 큰 힘이 되었기에 둘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그러다 거래 물량도 늘어나고 북진여각에서 임방을 내며 임구학도 왕래가 수월한 장회로 나오게 된 것이었다. 섬밭골에 비하면 장회는 대명천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장회가 임방을 세울만한 곳은 되지 못했다. 장회가 물과 산뿐이어서 큰 마을이 들어설 곳도 없거니와 인근에 단양 쪽으로 꽃거리와 하진이 있고 청풍 쪽으로는 계란재만 넘으면 수산에 장이 있어 수로든 육로든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임구학이가 장회에 임방을 차린 것은 임구학이가 가죽장사를 주로 했기 때문이었다. 가죽이 값진 물건이라 여느 고을민들이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이 쓰는 사치품이 가죽이었기에 굳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에 차릴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가죽 다듬는 일을 배워왔고, 직접 짐승까지 사냥하다보니 그쪽 일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가죽을 보는 눈이 조금이라도 있는 장사꾼이라면 임구학이 갈무리해놓은 가죽을 보고 군침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점점 임구학을 직접 찾아오는 장사꾼들이 늘어났다. 그러자 임구학이 만든 가죽만으로는 수요를 충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초장에 장회에서 가죽 장사를 할 때는 임구학이도 여러 마을과 장들을 돌며 남의 물건을 사들였다. 장사꾼 인심 나는 것은 한 끗 차이였다. 조금 잘 쳐주면 후하다며 입이 닳도록 칭찬하다가도 조금 박하면 천하에 상종 못할 인종이라며 등을 돌렸다. 그것이 장사고 세상인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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