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읽는 열 가지 미술 키워드]소아성애(pedophilia)를 미술작품이 정당화하는 방식
[여성의 눈으로 읽는 열 가지 미술 키워드]소아성애(pedophilia)를 미술작품이 정당화하는 방식
  • 충청매일
  • 승인 2020.04.12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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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소녀: 소아성애의 정당화와 그에 맞서기
(1) 발튀스의 에로틱한 소녀들
프랑스 화가 발튀스, 에로틱한 소녀들의 그림 다수 남겨
작품 ‘꿈꾸는 테레즈’서 속옷 노출한 사춘기 소녀 그려
“관음증 낭만화” 온라인서 뉴욕미술관에 전시 철거 요구
‘황금시절’도 도발적 자세의 어린아이 심적 불편함 안겨
그의 작품 속 아이들, 자신이 성적 욕구가 있는 듯이 묘사
왼쪽부터 발튀스 ‘꿈꾸는 테레즈’ 1937년, 발튀스 ‘황금시절’ 1945년경.
왼쪽부터 발튀스 ‘꿈꾸는 테레즈’ 1937년, 발튀스 ‘황금시절’ 1945년경.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유아기를 막 벗어난 어린 아이들에게 성적인 흥미를 느끼는 인간들이 있다. 지극히 내밀한 어떤 개인의 성적인 취향에 대하여 그 원인이 무엇인지, 과거의 어떤 사건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깊이 알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범죄심리학자의 관심사일 것이다. 미술의 이야기를 하는 이 자리에서는 그러한 취향이 반영된 작품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관람자의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발튀스(Balthus)의 그림 ‘꿈꾸는 테레즈’를 보자. 실내에 탁자와 의자들이 널려 있고 어린 여자아이가 등을 기대고 팔을 머리에 올린 채 눈을 감고 있다. ‘꿈꾸는’이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머리에 올린 팔의 긴장도를 볼 때 이 아이는 눈을 감고 있을 뿐 자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관객이 이 그림을 처음 접하는 순간 눈길을 사로잡는 부분은 이 아이가 눈을 감고 있는지 뜨고 있는지 잠든 것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한쪽 다리를 올려 치마가 들려져서 보이는 아이의 다리 사이 속옷이다. 잘 들여다보면 하얀 속옷의 주름과 사타구니 부위가 어찌나 정성스럽게 그려져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맨다리와 팬티까지 드러내 보여주는 이 아이의 나이는 얼마 정도 되어 보이는가. 발튀스는 주로 이웃집의 소녀나 친구의 딸, 혹은 고용인의 딸 등 지인의 아이들을 모델로 삼았고, 이 그림의 주인공 테레즈는 이웃집 아이로 2~3년간 발튀스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12세 정도가 됐던 테레즈는 이웃집 화가 아저씨가 주문하는 포즈를 충실히 취해 주었을 것이고,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그림 속에 담기는 것을 신기해했을 것 같다. 하지만 겨우 아이티를 아직 벗지 않은 여자 아이에게 요구한 포즈 치고는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어린 여자아이에게 에로틱한 자세를 요구하며 그린 발튀스의 그림은 이 한 점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리를 들어 속옷을 보여주는 것 정도는 시빗거리도 아닐 정도로 말이다. 창가에 걸터앉은 소녀가 자신의 한쪽 가슴을 드러내 보여준다던지, 성인 여성과 여자 아이가 서로 옷을 움켜쥐고 싸우는 듯한 구도에서 아이의 하반신이 맨살로 다 드러나 보인다던지, 특정한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포즈를 취하게 한 그림들이 수두룩하다. 발튀스는 전 생애동안 에로틱한 소녀들의 그림을 그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들을 ‘에로틱한 소녀들’이라고 불러도 될지 멈칫하게 된다. 이 어린 소녀들의 에로틱함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 에로틱함은 어린 소녀들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인가? 주체할 수 없는 에로틱함이 흘러 넘쳐 그 아이들을 화면에 담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에로틱한 소녀들로 그릴 수밖에 없는 것인가? 글쎄, 오히려 아직 어른들의 세계를 잘 모르는 어린아이들에게 성적인 시선을 보내는 화가의 환상이 이 소녀들에게 에로틱함을 씌운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은, 지나치게 화가의 예술적 의도를 폄하하는 일일까? 이러한 의심은 미술사에 무지한 사람들이 작품 그 자체의 가치를 몰라보고 그려진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차원적인 판단이라고 무시될만한 것인가?

하지만 이러한 판단이 나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2017년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발튀스의 ‘꿈꾸는 테레즈’가 전시실에 걸렸을 때, 1만명이 넘는 이들이 이 작품의 철거를 요청하는 온라인 청원에 서명했다. 청원의 이유는 이 작품이 아동을 성애적으로 바라보는 관음증적 시각을 낭만화시키고 있으며, 성적으로 대상화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메트로폴레탄 미술관측은 이러한 청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전시실에서 철수할 계획이 없음을 밝혔다.

메트로폴리탄측은 시각예술이란 인류의 과거와 현재를 담고 있는 것이며, 미술관의 사명은 이러한 시대적 유산을 수집하고 연구하고 보존하고 전시하여 많은 토론과 창조적인 표현을 통해 현재의 문화에 대한 지속적인 혁신을 독려하는 것이라는 원론적인 답변을 내놓았지만, 사실상 발튀스가 쌓아오고 메트로폴리탄이 인정한 미술사적 명성을 온라인 청원 따위가 무너뜨릴 수 없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메트로폴리탄은 이 작품을 1998년부터 소장하고 있었으며, 앞으로도 특수한 재난이 없다면 영구히 보존될 것이다.

발튀스는 발타자르 클로소브스키 드 롤라(Balthasar Klossowski de Rola)라는 긴 이름을 가진 폴란드계 프랑스 화가이다. 1908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나 2001년 스위스에서 사망할 때까지 팔십여년의 작품 이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남긴 작품들의 양도 상당하다. 또한 이 상당한 양의 작품들 중 대부분이 에로틱한 여자아이들의 그림이다. 물론 발튀스의 이러한 주제의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부모가 일찍 이혼하고 어머니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특별한 사이로 지내면서 발튀스는 릴케의 지원을 통해 어린 시절 삽화집을 출간하기도 하고 문학작품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하인리히 호프만의 ‘곱슬머리의 피터’를 인상 깊게 읽었으며 이러한 문학작품들이 발튀스의 소녀들에 대한 관심에 양분을 제공했다는 것이 발튀스 연구자들의 분석이다.

그 무엇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해석되건 간에 발튀스의 주제의식은 오직 소녀들에 대한 성애적 관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경의 작품 ‘황금시절’에도 역시 한 다리를 올리고 다리를 무방비로 벌린 채 소파에 길게 늘어져 있는 어린 소녀가 등장한다. 치마 아래의 속옷이 보이는 대신 이 아이는 상의의 어깨 부분이 드러나 있다. 아직 사춘기에 접어들지도 않았을 것 같은 어린아이의 신체이지만 대단히 도발적으로 보이는 자세이다. 더군다나 아이는 손거울에 얼굴을 비추어보며 자신의 미모에 푹 빠진 것 같은 모습이다. 거울-나르시시즘-허영이라는 미술사 속에서 대단히 흔한 도상을 사용하면서 성인 여성이 아니라 무방비 상태의 어린아이가 등장하는 것을 보는 일은 심적인 불편함을 안겨준다. 게다가 화면의 오른쪽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와 그 벽난로로 거의 들어갈 것 같은 몸짓을 하고 있는 상반신을 벗은 남성을 보면, 이 그림의 성적 메시지는 은유와 상징으로 비껴갈 것도 없이 너무도 명백해 보이는 것이다. 성인 남성과 아직 덜 자란 여자아이, 게다가 유혹하는 것 같은 몸짓을 한 여자아이, 이 모든 요소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소아성애(pedophilia)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작품을 마주했을 때 어떤 역겨움, 젊잖게 말해 마음의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예술작품에 대한 예의에서 벗어나는 일일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 미술사와 미술비평의 영역에서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적인 방법론을 제시한 미술사가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용기를 준다. “여성들은 다음과 같이 질문할 권리가 있다. 정확히 말해 이 작품은 누구를 위해 에로틱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남성이 지배하는 에로틱한 이야기에 왜 내가 복종해야 하는가? 성도착적인 남자의 시선이 에로틱한 이야기와 동등하게 되거나 동일시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인가? 미약하면서도 유혹적인 청소년의 이미지를 보편적인 에로티시즘으로 만들면서 나의 성을 계속 신비화시키고 있는 담론을 내가 왜 승인해야 하는가?”

게다가 발튀스의 작품들은 그림 속 아이들 그 자신이 성적 욕구가 있는 듯이 그림으로써, 그 아이들에게 에로틱한 욕망을 가지는 것을 정당화해주고 있다. 사실상 많은 위험에 노출되며 성장해야 하는 여자 아이를 에로틱하게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그것을 그림으로 남기고, 그 작품이 미술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고전으로 자리 잡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거듭 말하지만 대단히 불편한 일이다. 힘없는 아린아이들이 자신들의 의지에 반해 어른들로부터 성적 폭력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오늘의 사회에서 이러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성에 대한, 사회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문을 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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