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일본·일본인

일본의 대조선 침략외교를 봐도 그들의 끈질긴 외교가 얼마나 집요하고 악착같은 악귀처럼 여겨지는지 한일합방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일찍이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곧바로 1868년 말경부터 키도 타카요시에 의해 정한론이 일었으며, 1875에는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일부러 군함을 서해로 이끌고 와 강화도 사건을 일으켰다. 이는 목적을 위해서 고의적으로 사건을 일으키는 일본외교의 간교한 술책으로 만주사변으로도 입증된다.

즉, 일제가 경제공황 만회와 만주지배 영역을 확대할 목적으로 공격의 빌미를 학수고대하던 중 관동군이 1931년 9월 18일 봉천(현, 심양)교외의 유조호(柳條湖)근처를 통과 중 만철 노선이 공격당해 폭파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관동군은 이 사건을 빌미로 만주사변을 일으키니, 이는 일본군 스스로 꾸민 교활하기 그지없는 자작극이었다.

일본은 일부러 일으킨 강화도 사건을 빌미로 그보다 21년 전 ‘쿠로부네(黑船:검은 배)’를 타고 위협적으로 다가 온 페리로부터 학습한 불평등조약을 그대로 조선에 강요, 미일수호통상조약보다 더욱더 불평등한 강화도조약(1876년)을 강제로 체결하게 됐다. 바야흐로 침략외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에 머무르지 않고 일본은 임오군란(1882년)으로 인한 일본인 피해배상을 둘러싸고 일본군 주둔(약간 명)을 명문화한 제물포조약을 맺었으며 동학혁명을 계기로 한반도에서 일어난 청일전쟁을 계기로 한일의정서(1차 한일협정서:1894년)를 체결했으며, 마침내 을사조약(2차 한일협약:1905년)으로 조선의 외교마저 좌지우지하더니, 1907년에는 정미조약(내정권<內政權> 장악)체결로 사실상 대한제국을 식물왕국으로 만들었으며, 드디어 1910년 8월22일 한일합방조약 체결로 이어져 42년간의 끈질긴 침략외교에 마침표를 찍었다.

실로 악착스럽고 집요한 끈질긴 침략외교의 종착점은 완전한 한국침탈이었다. 이렇듯 일본의 침략외교는 한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부단히 끈임 없이 집요한 외교를 펼친다. 일본은 일찍이 페리제독에 의해 불평등조약을 맺게 된 후 이를 고치기 위해 무려 40년이 넘는 세월 끝에 목적을 달성한 적이 있다.

이처럼 일본외교는 한 가지 목적달성을 위해 끈질기고 지독하다. 일본외교는 한 가지 결정된 정책사안을 이루기 위해 끈질긴 외교를 행하며, 외교문서 작성 시에는 애매한 문구(타마무시이로-비단벌레 색깔)로 작성하여 후일 문제가 생길 때는 그 해석이 상반되게 나타난다. 이 또한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치에부꾸로(智慧袋-지혜(꾀)주머니)’일 것이다. 

하여튼 일본외교의 끈질김과 집요함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역사로부터 우리는 두 눈 부릅뜨고 일본을 철저히 분석해야한다. 그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고 있으며, 천황제와 신토오가 지속되는 한 앞으로도 대한반도정책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한반도를 고대로부터 현재까지도 일본 안보의 사활이 걸린 가장 중요한 특급 생명선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은 대한외교를 대미, 대중, 대러 외교에 버금갈 정도로 중요시 여기고 있음이며, 우리 통치자가 훌륭하면 한·일간에 평화가 오나, 똑똑지 못한 통치자로 인해 나라가 분란을 일으키면 언제라도 쌍심지 켜고 달려드는 것이다.

요즘 일본이 부쩍 독도문제를 물고 늘어짐도 시대의 한 단면을 일본이 정확히 포착하고 있음이다. 대미, 대중, 대러 외교에 버금갈 정도로 중요시 여기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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