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다시 흥정하자는 배영학의 제의는 북진여각 입장에서 보면 매우 달가운 소리였다. 봉화수가 황강까지 달려가 현물거래가 아닌 돈으로, 그것도 청풍도가가 주는 값의 두 배를 무조건 주겠다는 약조까지 하면서 거래를 성사시켰었다. 그러나 청풍도가를 쓰러뜨리려면 한순간에 될 일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싸워야 할 일이었다. 그러려면 버티고 맞서 싸우려면 그동안 많은 돈이 필요했다. 한 푼이라도 돈은 아껴야 했다. 현물보다도 돈은 쓸 용처가 많았다. 그런데 배영학이가 흥정을 다시 하자고 하니 참으로 반가운 말이었다. 그런데도 봉화수는 배영학의 제안을 덥석 물지 않고 뜸을 들였다.

이틀이 지나도록 북진여각에서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그동안 배는 짐도 하역하지 못하고 북진나루에 정박해 있었다. 배영학은 몸이 달았지만 그저 어정거리며 북진여각 언저리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북진여각 구석구석을 세세하게 살펴보았다. 볼수록 북진여각이 만만한 장사꾼 집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남한강 상류의 궁벽한 강마을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짜임새나 규모를 보나 큰 고을 상전을 능가하는 힘이 있어보였다.

“배 객주님, 오늘은 제가 우리 여각을 구경시켜드리리다!”

사흘 만에 나타난 봉화수가 배영학에게 여각을 보자며 나섰다. 봉화수가 대선도 몇 척이 동시에 짐을 부릴 수 있는 북진나루와 항시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상전거리와 장마당을 보여주고 북진여각의 곳간들이 즐비한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당에는 수 십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일꾼들이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형님, 오늘 아침나절에 들어온 특산품들입니다.”

강수가 마당으로 들어오는 봉화수를 발견하고 말했다.

“어디서 들어오는 것들이냐?”

“매포·하진·장회·수산·덕산에서 들어온 것들입니다.”

“강 상류 쪽과 봉화재 쪽 마을에서 도가로 들어가는 통로는 단단히 막고 있겠지?”

“형님, 염려 놓으시오! 우리 아이들이 도라지 한 뿌리 흘러나가지 않도록 눈에 불을 키고 임방객주님들과 힘을 합쳐 사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들이자마자 즉시 여기 여각으로 모두 옮기고 있습니다.”

강수 목소리에서 힘이 넘쳐흘렀다.

“강수는 하나하나 점검하며 빈틈없이 진행시키거라!”

“예, 형님!”

“강수야, 곳간을 모두 열어라!”

허리를 굽혀 대답하는 강수의 등에 대고 봉화수가 여각의 모든 곳간 문을 열라고 했다.

“곳간문은 왜요?”

강수가 봉화수와 함께 서있는 배영학 일행을 보며 물었다.

“걱정 말거라! 이분들에게 우리 곳간을 보여주려고 한다.”

봉화수가 강수를 안심시켰다.

장사하는 사람들의 곳간은 돈이 들어있는 돈 쾌나 마찬가지였다. 돈 쾌는 부자지간에도 함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다. 하물며 생판 본 적이 없는 남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봉화수가 초면인 타관 사람을 데리고 와 곳간 문을 열라하니 강수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봉화수의 말을 거스릴 수는 없었다. 강수가 마당 가장자리를 따라 즐비하게 일곽을 이룬 곳간 문을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배영학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이런 물산들이 저 곳간들마다 다 들어차 있단 말이오?”

배영학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북진여각의 곳간 문이 열릴 때마다 그 안에는 특산물들로 가득했다. 첫날 북진나루에 닻을 내리고 장마당에 와 상전에 진열되어있던 물산을 보고 놀랐던 배영학이었다. 그것을 보고 두 배의 값을 치루겠다는 봉화수에게 흥정을 다시 하자고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곳간 안 물산을 보며 상전에 진열되어 있던 물건들은 아예 기억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만 있는 것이 아니오. 청풍 관내는 물론 남한강 상류 강원도 땅에 있는 우리 열두 개 임방들 곳간에도 이런 물건들은 얼마든지 있소이다!”

봉화수가 조금은 과장스럽게 허풍을 떨었다. 물론 배영학의 기를 꺾기 위함이었다. 무슨 일이든 생각을 하고 있다가 당하면 충격이 덜한 법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고 있다가 은연중에 닥치면 혼란이 더한 법이었다. 배영학은 그저 시골구석 장사꾼에 불과할 것이라고 단정 지으며 무방비로 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하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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