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모성:강요된 이상
(1) 행복한 어머니라는 이념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 라파엘로 작품 ‘방울새의 성모’
인자한 성모 마리아 중심으로 아기 예수·세례 요한 그려
종교화 속 성모 마리아 예찬…女가 추구해야 할 어머니상
18세기, 아이를 유모·위탁가정에 맡기는 건 임무 방기 여겨
그뢰즈 ‘사랑받는 어머니’, 시대 이념 반영한 전형적 작품
아이들에 둘러싸여 사랑받는 어머니이자 부인으로 묘사
행복한 어머니 신화 지금도 설득력 가지는 조건으로 작용

왼쪽부터 라파엘로 ‘방울새의 성모’ 1505~1506. 장-밥티스트 그뢰즈 ‘사랑받는 어머니’ 1770년경.
왼쪽부터 라파엘로 ‘방울새의 성모’ 1505~1506. 장-밥티스트 그뢰즈 ‘사랑받는 어머니’ 1770년경.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잘 알려진 명언은 19세기 프랑스 작가 박토르 위고(Victor Hugo)의 말이다. 약한 여성이 자신의 아이가 트럭에 치일 위기에 처하자 차를 번쩍 들어 올렸다는 식의 출처를 알 수 없는 사건들이 이 명언을 실증하는 사례로 이야기된다.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을 수도 있고, 물론 우리는 동서양의 역사에 남겨진 위대한 어머니들을 알고 있으며, 현재에도 훌륭하다고 평가될 수 있는 어머니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머니가 강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댓구로 여자가 약하다는 말은 왜 사용되었을까. 이 문장은 세간에 회자되며 모성의 위대함에 대한 예찬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반면 어머니가 되지 않은 여성에 대한 폄하를 함께 담고 있다.

‘여자’와 어머니‘를 대별시켜 어머니가 됨으로써만 여성이 강함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됨으로써 여성이 비로소 강하고 훌륭해질 수 있다면 어떤 여성이든 어머니가 되는 것을 마다치 않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가 됨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성취한 여성으로는 12세기 무렵부터 오늘날까지 칭송되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Rafaello Sanzio)의 ‘방울새의 성모’에는 성모 마리아가 걸음마를 갓 뗀 것 같은 아기 예수와 그보다 몇 개월 더 자란 것 같은 세례자 요한을 돌보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라파엘로는 여러 점의 성모자상을 남겼기 때문에 편의상 그림 속에 있는 특수한 점을 들어 제목으로 구별하는데, 이 그림에는 어린 세례 요한의 손에 놓인 방울새를 아기 예수가 쓰다듬으려 손을 뻗는 모습에서 ‘방울새의 성모’라는 제목에 붙여졌다. 이 그림 속에서 성모 마리아는 평온한 풍경 속에서 두 아기들을 돌보고 있으며, 르네상스에 그려진 성모답게 차분히 눈을 아래로 내려 깔고 입술에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머금고 있다. 성모는 자신의 무릎 사이에 아기 예수를 두어 안전하게 지탱해주고 있고, 아직 작은 발을 가진 세례자 요한이 넘어질세라 손으로 등을 감싸 보호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마음이 편해지고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무사평안하게 흐르는 육아의 시간이라니.

성모 마리아의 위대함은 수태고지에 의해, 그러니까 하느님의 말씀으로 예수를 잉태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성경 외전(Apocrypha)에는 공인 성경에서 다루지 않는 마리아의 일생이 더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마리아 그 자체로 위대한 여성이기보다는 예수의 어머니가 됨으로써 그녀의 위대한 일생이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만으로 어머니가 되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성인이 될 때까지 예수를 기른 어머니 마리아는 이후 위대한 어머니의 전형으로 칭송되었을 뿐 아니라 카톨릭에서는 신에 가까운 지위를 획득한다. 성모 마리아라는 인물이 종교 안에서 어떻게 해석되는가는 중세로부터의 긴 발전의 역사가 있다.

그리하여 신앙으로 모든 역경을 견디고 아이를 무사히 낳고 기른 예수의 어머니는 후에 속인들의 죄를 대신해 용서를 구하는 자비의 이미지까지도 가지게 된다. 아무래도 이 세계를 관장하는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남성의 모습으로 그려져 왔으니, 그에 대응하는 어머니의 역할이 필요하지 않았을까도 생각된다.

이 모든 역사를 뒤로 하고, 우리는 그저 라파엘로의 이 그림 ‘방울새의 성모’에 집중해보자. 바위에 걸터앉은 마리아는 아직 위태로운 아기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들을 보호함과 동시에 한 손에는 당연히 성경일 것으로 생각되는 책을 한 권 들고 있다. 육아의 경험이 있는 모든 여성 혹은 남성들은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대번에 알 수 있다. 이 연령대의 아기들을 돌보는 현장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때에 따라 혼비백산을 하지만 않아도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한 장의 그림 속에 여러 의미를 담아야 하는 종교화 속에서 아기 예수와 함께 있는 성모 마리아는 늘 이토록 차분하고 늘 경이롭게 아름답다. 이렇게 품격 있고 아름다우며 게다가 행복해 보이는 어머니를 그린 그림은 중세 이래 계속 기독교 종교화에 등장함으로써 모든 여성이 추구해야 할 어머니의 모습으로 여겨졌다.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이고 죄의 길로 들어서게 한 이브와는 천양지차의 품격이 있는 여성이 바로 성모 마리아인 것이다. 미술의 역사 속에서 여성은 이브 아니면 성모 마리아, 즉 남성을 꼬드겨 죄를 짓게 하는 나쁜 여자와 위대한 어머니로 대별되어 왔다. 일반적인 현실의 여성들은 당연히 전자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종교화 속에서 줄곧 성모 마리아가 예찬되어 왔던 방식과는 별개로 현실의 어머니들은 자식을 키워 왔을 것이다. 대개는 머리를 질끈 묶고 육아와 가사, 그리고 사회적으로 일을 하는 이중 삼중의 노동에 시달리면서, 혹은 육아를 남의 손에 맡기면서 말이다. 실제로 서구에서는 귀족 여성이건 평민의 여성이건, 아기를 실제로 자신의 손으로 키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어머니들의 삶이었다. 신분이 높은 여성은 유모가 아이를 대신 키워주었고, 일을 해야 하는 평민 여성들은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아이를 돌볼 여력이 되는 다른 가정에 위탁해 양육을 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행은 18세기까지 계속되었으나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문제시되었다. 특히 에밀 루소의 교육에 대한 이념은 육아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 아기에게 영아기로부터 말을 배우는 나이까지의 어머니의 교육이 이후의 인생에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는 루소의 교육관은 근대적인 모성의 의미를 탄생시켰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린이에 대한 관념은 여전히 루소의 테두리 내에 있어서, 온갖 방법의 태교로부터 시작되는 어머니의 교육이 당연하게 생각된다. 뱃속의 아기에게 말을 건네면서 지극한 어머니의 사랑이 시작되고 그것이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체험이라는 관념이 계몽기 이전에는 없었던, 만들어진 이념이라는 것이다. 

계몽주의 이념이 삶에 개입되기 시작했던 18세기에는 유모와 위탁가정에 맡기는 것이 모성애 위배되는, 어머니의 임무를 방기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고 제 손으로 기르는 여성이 가장 훌륭한 여성이고, 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성이라는 이념은 미술작품 곳곳에서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뢰즈(Jean-Baptiste Greuze)의 드로잉 작품에는 이 시대의 이념을 반영한 전형적인 ‘행복한 어머니’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 작품에서 어머니는 여섯 명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가장 어린 아기는 가슴에 안겨 있고, 어머니를 사랑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는 각 연령대의 어린 아이들이 무릎 사이에, 머리 위에, 양 팔에 매달려 있다. 이 여성의 남편으로 보이는 남성이 노동을 마치고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으며 팔을 벌려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이 여성은 아이들에 둘러싸인 채 지극히 사랑받는 어머니이자 사랑받는 부인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이 어머니가 혹시 기절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러 명의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매달려 있다니 도대체 어떻게 살 수 있을 것인가 대신 걱정해주게 된다. 그다지 부유해보이지도 않는 이 비좁은 실내에서 아이를 연년생으로 낳고 기르는 이 어머니는 정말로 행복할까. 사실 그녀의 내면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실존적인 의문으로 복잡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하지만 ‘행복한 어머니’의 신화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설득력을 가지는 여성의 조건으로 작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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