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판이 백성이 원을 칭송하고, 원이 고을을 잘 다스린다 하여 출세를 하는 그런 풍토가 아니었다. 지금의 대궐은 외척들 세상이었다. 좁쌀만큼이라도 외척의 피가 튀었으면 어중이떠중이라도 득세를 하고 권세를 누렸다. 그런 외척 정치판에서 아무런 끈도 없는 이현로가 벼슬자리가 떨어지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손바닥을 비비는 일이었다. 그러나 손바닥 비비는 재주만 가지고 영화를 누릴 수는 없었다. 손바닥을 비비면서도 손을 높이 들어 무언가는 상납을 해야 할 일이었다. 예로부터 청풍은 산이 좋고 물이 좋아 타지방에서는 구할 수 없는 귀한 물산들이 많은 곳이었다. 이것을 발판으로 한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북진여각 최풍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전들 또한 부사의 비위를 맞춰 대대손손 누려오던 영화를 누리려면 부사가 원하는 물목들을 구해서 대령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아전들 또한 사농공상의 제일 밑바닥 인생인 장사꾼이기는 했지만 최풍원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최풍원은 그것을 빌미로 관아의 모든 이권을 차지하여 이득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부사와 아전, 최풍원이는 서로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그런 흡착된 관계였다.

“부사와 나리들한테 절대 섭섭하게 하지는 않을 터이니, 여러 나리들이 힘 좀 써 주시우.”

최풍원이 아전들에게 보답을 하겠다는 암시를 심어 주었다.

“그래, 부사 영감은 어떻게 모시기로 했는가?”

이방 민겸이 은근하게 물었다.

“뭐가 그리도 궁금하시옵니까? 나으리도 원하시면 품으시면 될 일을…….”

최풍원은 초저녁부터 미향이를 단장시켜 은밀하게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미향이는 대단한 요부였다. 한 남자로는 도무지 충족이 되지 않는 그런 여자였다. 부사 이현로를 오늘 밤 녹여놔야만 하는 것이 미향이의 막중한 책임이었다. 하기야 미향이로서는 초로기의 부사 하나쯤 요리하는 것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한창 힘이 뻗치는 총각이라도 하룻밤 노리개에 불과할 정도로 밝히는 미향이가 그까짓 단물 다 빠진 중늙은이 하나쯤이야 성에 차겠는가.

부사 이현로가 영모의 안내를 받으며 따라간 곳은 버드나무집 별채였다. 부사 이현로가 방안으로 들어 아랫목에 좌정을 하고 앉아 주위를 찬찬하게 둘러보았다. 방안에는 쌍나비 촛대에 밝혀진 불빛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은은하고, 아랫목에는 비단금침이 곱게 깔려있고, 머리맡으로는 열두 폭 화조병풍이 더욱 아늑한 분위기를 돋웠다. 문득 이현로는 세월을 되짚어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첫날밤 기억이 떠오르자 가슴이 설레었다. 한양의 집을 떠나 수 백리 떨어진 산중의 임지로 온 지 벌써 서너 달, 부인의 기억도 아물아물하고 적적함만 첩첩이 쌓여갔다.

“허엄!”

이현로의 헛기침 속에는 짜증스러운 기다림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휭휭 스쳐가는 바람 소리만 들려올 뿐 정작 인기척은 그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정적이 흘렀다. 정적과 무료함을 참지 못한 이현로가 또다시 헛기침을 해댔다. 여전히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자신을 홀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은근히 부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병풍으로 가려진 윗방 미닫이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치맛자락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을 가로막고 있던 병풍 한쪽 폭이 조용하게 접혀지며 나타난 미향이의 모습에 이현로는 취기가 일시에 달아남을 느꼈다. 청풍부사로 내려온 지 두어 달 만에 처음으로 보는 절세 미색이었다.

“소첩 미향이라고 하옵니다.”

미향이가 큰절을 올렸다. 한 마리 백로처럼 빼어난 자태였다. 나풀거리는 치마 자락에 촛불이 파르르 떨었다. 그 불빛에 미향의 얼굴이 사라졌다 드러났다를 거듭했다. 이현로의 가슴 속에서 방망이질 소리가 마구 들려왔다. 미향의 미색에 숨이 막혀 말문이 터지지를 않았다.

“미색이로구나!”

이현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태연한 척 말했다.

“이것도 큰 인연인데 소첩이 합방주 한 잔 올리겠나이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이현로의 시선을 부끄러운 듯 피하며 미향이가 말했다.

“이 좋은 밤에 합방주 한 잔이 없어서야 되겠느냐!”

미향이가 살며시 일어나 병풍이 쳐진 윗방으로 올라가 주안상을 들고와 이현로의 앞에 놓고는 다소곳하게 마주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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