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이번에 우리 쪽에는 가뭄이 심해 보리 밀 같은 봄작물이 거개 다 타버렸다네. 그래서 거둘 게 별반 없으니 보릿고개를 넘으나마나 굶주리는 것은 매 한가지여. 지난 번 공납 때도 미리 받아다먹고 염치는 없지만 사정이 다급해 그러니 이번 마늘 값도 보리나 밀로 먼저 땡겨주면 안 되겠는가?”

“형님 얘기를 들으니 보지 않아도 딱한 사정이 환하게 보입니다. 한데, 지금 여각도 여러 일을 벌여놓고 사정이 만만찮아서…….”

최풍원도 어찌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말꼬리를 흐렸다.

“나도 그걸 왜 모르겠는가? 그래도 여각에 와 대행수를 만나면 무슨 방도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 와봤구먼.”

차익수의 얼굴에서 낙심천만한 표정을 봤지만 최풍원도 지금 당장 감당해야 할 짐이 첩첩산중이었다.

“형님, 일단 돌아가 있으면 저도 무슨 방도를 내보겠습니다.”

차익수가 돌아가고 이틀 뒤쯤 박한달 객주가 조산촌에서 북진여각으로 돌아왔다.

“상전 터도 다 다져졌고 주추도 놓아졌으니 인제 기둥 세우고 집짜기만 하면 되겄네! 우리 곡물전은 주인도 없는데 우째 돼가나 모르겠구먼!”

박한달이 북진장터 상전 공사장을 둘러보고는 최풍원을 찾아왔다.

“박 객주님, 고생 많았습니다. 그간 조산촌 사정은 차 객주 형님을 통해 들었고 형편이 그리 안 좋은가요?”

“무슨 수를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들인 공이 허사가 될 판이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안직까지는 마늘 수확 끝내고 조금만 기다리면 단양 장사꾼들보다 후한 값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그 희망으로 버티고 있지만 그게 얼마나 갈 지는 알 수 없다네!”

박한달도 확신이 서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 급합디까?”

“잔칫날 잘 먹을 수 있다고 마냥 굶어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야 그렇지만…….”

며칠 전 차익수 객주로부터 조산촌 사정 이야기를 듣고 또 박한달로부터 사정을 듣고보니 매우 급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최풍원도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여기로 오기 며칠 전부터 단양 장사꾼들이 곡물을 지고와 우리가 도거리한 물건까지 집적거리고 있다네! 차 객주와 관계도 그렇고 우리와 약조한 것도 있어 아직까지는 그리 흔들리는 것 같지 않지만 마냥 버티지는 못할 것이네. 당장 창시가 등가죽에 붙어 눈깔이 튀어나올 지경인데 눈 앞에 곡물을 들이대고 구슬리는데 버틸 장사가 얼마나 되겠는가?”

“무슨 수를 내야겠군요!”

“내 생각으로는 한시가 급하네! 단양 장사꾼들이 그걸 이용해 말도 안 되는 금으로 후려치고 있는데 당장은 아까워 버티고 있지만 배곯는 데 버틸 장사는 없네!”

“박 객주께서는 객주들을 독려해 인근 마늘 산지를 돌며 만 접을 채워주시오. 그리고 갈무리해서 선적할 준비까지 마무리해주세요!”

“아니! 당장 조산촌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에 다시 산지 마늘까지 사들이겠단 말인가? 더구나 만접이나?”

박한달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최풍원을 바라보았다.

“조산촌 문제는 내가 해결할 테니 박 객주께서 책임지시고 스무날 전까지 북진으로 옮겨놔 주세요!”

최풍원이 박한달에게 무조건 마늘 일만 접을 북진여각 창고에 쟁여놓을 것을 지시했다.

“이보시게, 대행수! 어찌하려고 그러시는가? 알겠네!”

잠시 박한달이 기가 막히는 지 머뭇거렸지만 허튼 소리를 하는 최풍원이 아니기에 그의 말을 받아들여 따르기로 했다.

이제껏 장사를 해오며 단 하루도 돈 걱정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이 언덕을 넘어가면 좀 편해질까 싶어 있는 힘을 다해 넘어서면 또 다른 언덕배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언덕배기를 넘으면 좀 더 험한 고개가 닥쳤다. 그 고개를 넘지 못하면 이제까지 해왔던 모든 일이 허사가 되었다.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 넘어갔다. 그런 고개를 숫하게 넘어왔다. 하지만 아마도 지금이 가장 힘든 고비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풍원은 북진여각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아니면 스스로 자멸하고 말 것인지는 지금의 이 고비를 넘느냐 포기하느냐에 달렸다는 위기감이 느껴졌다. 갑자기 두려움과 함께 외로움이 몰려왔다. 누구라도 좋으니 자신의 이런 속마음을 털어놓고 의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최풍원의 곁에는 그럴만한 사람이 없었다. 결국 근본적인 해결은 최풍원이 해야 할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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