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유공자 신재순옹
18살의 나이에 호국군 입대
동족상잔 전장 수십차례 투입
“평화 안주말고 안보 생각해야”

6·25전쟁에 참전한 신재순 할아버지가 6·25전쟁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6·25전쟁에 참전한 신재순 할아버지가 6·25전쟁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충청매일 양선웅 기자] 열다섯이 되던 해, 조국이 해방됐다. 다니던 기술학교도 없어져 갈 곳이 없었다. 모두가 가난했고 하루하루 끼니걱정에 삶이 고단했다.

1948년 18살의 나이. 군에 입대하면 밥은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들었다. 입대하기에는 한살이 모자라 서류에 적힌 생년을 고쳐 적어냈다.

‘호국군’에 입대해 1년간의 훈련이 끝나고 1949년 6월 원주 6사단 사령부로 배치 받았다. 40일간 지속되던 비상대기가 풀리고 대부분 장병들이 휴가와 외박을 나갔다. 내무반에는 7명이 남아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귀를 찢는 비상 사이렌소리를 들었다.

사령부에서 ‘북한의 침공으로 38선 일대가 초토화됐다’며 출동준비를 갖추고 집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제대로 된 지원과 보급품 없이 군용트럭에 몸을 맡긴 채 전투가 벌어지는 춘천으로 보내졌다.

인민군부대가 이미 춘천인근을 점령하고 있었고 북한군 탱크가 아군을 향해 포격을 퍼붓고 있었다. 그제야 전쟁이 실감났다.

휘몰아치는 북한군의 공세에 충주까지 후퇴했다. 당시 푸른색으로 빛나야 할 달래강이 국군과 인민군의 시체와 피로 가득했다. 부대는 팔공산 방어선까지 후퇴를 거듭했고 같이 출발했던 전우들을 대부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이후에도 동족상잔의 피로 얼룩진 전장에 수십 차례 투입됐다.

인천상륙작전을 기점으로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 인근까지 북진했다. 기세를 이어 10월 23일 평안북도 희천을 수복하고 26일 압록강에 다다랐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중공군개입으로 후퇴해 다시 임진강까지 밀려왔다.

1952년 10월 철원 금성지구에서 중공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분대를 이끌고 중공군과의 국지전을 벌이던 중 7발의 총탄이 몸을 찢고 뼛속에 박혀들었다. 5발은 다리에, 2발은 복부를 찢고 지나가 내장이 쏟아졌다. 눈앞에서 분대원 1명이 죽고 나머지 6명도 큰 부상을 입었다. 그 상황에서 6명을 데리고 후퇴에 성공했다.

부대 복귀 직후 헬기를 타고 미 8군 의무대로 긴급 후송됐다. 그것이 마지막 전투였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신념하나로 참전했던 신재순(89·청주 오송읍)옹은 69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신재순 참전유공자는 치열했던 전쟁을 회상하며 “같은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피를 흘려야 하는 일은 두 번 다시 발생하지 말아야한다”며 “당시 20살도 되지 않던 꽃다운 나이의 전우들이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억장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이어 “전쟁으로 인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한 우리를 후세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며 “우리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이 지금의 평화에 안주하지 말고 항상 안보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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