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노고산성 답사를 떠난다. 지도를 보면서 들머리를 찾았다. 옥천으로 가는 대청호반도로에 들어섰다. 대전시 동구 직동 체험마을에서 왼쪽으로 성치산성을 두고 10분쯤 달려 찬샘정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찬샘정에서 바라보이는 호수의 경치가 아름다워 정자에 올라 한참동안 주변을 돌아보았다. 물속에 잠긴 벌말을 건너 후곡리 마을이 보일 듯 말 듯하다. 노고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볕이 따뜻해서 양탄자를 디디는 것처럼 부드럽다. 겨울나무 가지 끝에 햇살이 묻어 곱게 푸르러간다. 옅은 안개 속에 묻힐락말락하는 호수에 감긴 산줄기가 더 아름답다.

정상까지 올라갔다. ‘기념물 19호 노고산성’이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성벽의 흔적이 여기저기 조금씩 보였다. 그래도 표지석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산성의 흔적은 그렇게 미미하다. 둘레 약 300m 정도의 석축 테뫼식 산성이다. 소대 정도의 군대가 주둔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성벽이라고 하는 것도 그냥 돌더미이다. 구조물을 설치했었는지 홈이 있는 돌도 보인다. 돌을 쌓아 놓고 가로대 같은 것으로 외부의 침입을 막는 장치를 마련해 놓았었는지도 모른다.

무너진 성을 다시 복원하면 원형이 망가지고, 그대로 두면 유물이 점점 더 사라지는 것이 되니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는 일이다.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일을 잘 판단해서 시급히 조치를 취해야 할 일이다.

저 아랫마을이 핏골이다. 이런 이름을 지은 것은 노고산성 전투에서 희생된 군사들의 피가 내를 이루었기 때문이라 전한다. 여기 노고산성과 견두산성 성치산성이 트라이앵글을 이룬 그 가운데에 핏골 마을이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여기 서서 대청호를 바라보니 경관은 빼어나지만 골짜기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었다는 핏골에 그날의 함성과 절규가 아직도 들려오는 듯하다.

성곽의 바로 옆에 할미 바위가 있다. 이 바위 때문에 노고산이라고 했다지만 할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전국에 노고산은 많다. 그리고 노고산에는 산성이 있게 마련이다. 옛사람들은 ‘노고老姑’라 하는 여신이 마을을 지켜주었다고 믿었다. 여신이 하룻밤에 성을 쌓았다는 등의 축성과 노고신의 전설이 하나의 유형을 이루어 전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전망이 좋다. 계족산성이 있는 계족산, 문의 양성산, 동으로 샘봉산이 보인다. 이곳은 주변의 다른 산성들과 연계하여 적을 막는 요새 구실을 했을 것이다. 지금은 물에 잠겨 있지만 경상도에서 옥천을 거쳐 바로 청주 부근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목을 지키는 요새이다. 노고산성은 바로 남쪽에 있는 견두산성, 동쪽의 백골산성, 문의 양성산성, 구룡산성과 규모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옥천 문의간 교통로를 지키는 소규모의 부대가 주둔하거나 계족산성이나 삼년산성의 전초기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주변에 산성이 특히 많은 것은 삼국의 접경지대였기에 그만큼 군사 시설이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특히 대청호 주변은 공주, 부여와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백제의 입장에서는 철통같은 경계를 해야 했을 것이다. 또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보니 지정학적으로 영남이나 호남권에서 서울로 향하려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교통의 중심지며 전략적 요충지로 빼앗고 싶은 곳이며 꼭 지켜내야 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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