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의 시인 정지용(1903~?)은 충북 옥천이 낳은 한국의 대표적 시인이다. 그의 행적과 죽음이 베일에 싸인 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끌려가 1950년 9월에 사망한 것으로 지금껏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한 월간잡지가 정지용이 미군의 포로로 잡혀 4년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박창현’이라는 가명으로 포로생활을 한 뒤 자진 월북했다는 증언을 발굴 게재해 진위여부에 논란이 일고 있다.

이 잡지가 게재한 내용에 따르면 경향신문 기자 출신의 김태운이 전후 시사종합월간지 ‘실화’에 1954년 6월호에 게재됐던 ‘포로 되었던 시인 정지용, 그의 이북행 비화’에는 1950년 정지용은 인공 치하에서 문학가 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인민군의 문화공작대 요원으로 낙동강 전투에 강제 투입됐다 8월 왜관 인근 ‘트리오트리’ 전투에서 인민군이 패퇴하면서 유엔군에 생포됐다는 것이다.
그 뒤 정지용은 노무자 박창현이라는 가명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이송된 후 소제부(掃除夫)를 거쳐 취사반장생활을 하면서 술과 번민으로 세월을 보내다 문학가 동맹활동과 인민군 문화공작대활동 등이 남쪽에서 용서를 받을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해 북쪽을 선택했다는 내용이다.

시인 모윤숙이 정지용을 찾기 위해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뒤졌다는 내용과 함께 “당시 북행을 택한 영문자 포로 명단에 1933년생 강원도 출신 ‘Park Chang Hyun‘(포로번호 0098017)이 있다. 그가 정지용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김태운의 보도로 정지용일 가능성이 커졌다”고 덧붙였다.

이 보도로 정지용이 태어난 옥천은 물론이요, 그의 시를 추모하는 후학들은 전문내용의 사실여부에 새삼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물론 타의든 자의든 정지용의 월북은 해방 후 좌우익 이념대립에 이어 한국전쟁으로 격동에 휩싸인 시대적인 상황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가명으로 포로생활을 했다는 발굴전문보도는 대충 읽고 넘길 일이 아닐 것이다.

이에 대해 정지용과 그가 시를 연구하는 후학들은 당시 포로생활을 하기에는 적지 않는 나이인 데다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이 잡지의 내용과는 다르다는 반론도 제기하고 있다. 어쨌든 이번 보도를 계기로 한국전쟁당시 정지용의 활동과 북한에서의 행적, 그의 죽음과 관련된 비사가 정확히 밝혀졌으면 한다. 이것은 비단 충북 옥천지역 뿐만아니라 우리나라 문단의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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