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모르고, 은혜도 모르는 금수가 될 뻔 했구먼!”

“그러게, 남 덕을 입고도 모른 척 한다면 그건 사람도 아니지! 우리가 북진본방 덕을 본 게 어디 한 두 가지인가? 우리도 뭐를 해서라도 그 공을 갚아야지!”

아무리 곤궁하게 살아도 남에게 받은 공을 모른 척 하는 그런 염치없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쌀섬을 진 사람들의 행렬이 줄나래비를 이루며 열을 지어 청풍장터로 들어섰다. 그 행렬이 나루에서 장터까지 이어졌다. 장관이었다. 청풍에서 쌀섬을 진 사람들의 이런 광경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청풍에서 제일 부자라는 김 참봉네 가을걷이 때도 이 정도에는 원래 미치지 못했다. 김 참봉네가 청풍 인근의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기는 했지만, 농민들로부터 거둬들이는 소작료는 알곡 육백 섬에 원래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가을만 되면 김 참봉네 집 안팎에는 청풍 인근에서 도지를 바치러오는 농민들로 북적였다. 그런데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곡식 섬을 지고 일사분란하게 열을 지어 가고 있으니 좀처럼 보기 힘든 구경거리였다.

“무슨 행렬이 저리 길다냐?”

“저 많은 섬들은 다 뭐고?”

“우리도 한 번 따라가 보세!”

장보러 나왔던 사람들도 덩달아 모여들었다.

곡식 섬을 진 지게꾼들 뒤로는 각 임방주들이 따르고 그 주변에서는 동몽회원들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사방을 살피며 청풍도가로 향했다. 그 주변으로 장에 왔던 사람들도 떼를 지어 따라갔다.

“이보시게들, 지고 온 섬들은 모두 이 앞에 내려놓으시오!”  

청풍도가 앞에 당도하자 김길성이가 마을사람들에게 소리쳤다. 김길성의 지시에 따라 지게꾼들이 곡식 섬을 내려 청풍도가 알 장마당에 쌓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도착한 사람들도 차례대로 곡식 섬을 쌓았다. 청풍도가 앞에는 금방 집채 만큼한 곡식 섬들이 무더기를 이뤘다. 마지막으로 학현리 사람들까지 모두 도착해 짐을 부리고 나자 김상만이 사람들 앞으로 나섰다.

“이보시오들! 여기 앞에 쌓여있는 곡식 섬은 여러분들이 청풍도가에서 빌려먹은 쌀이요. 그동안 청풍도가에 진 빚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초를 당해왔습니까? 쌀 좀 빌려먹고 진 빚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잠자코 있어야했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소이다. 내 물건인데도 내 맘대로 팔지도 못하게 하고, 우리들 물건 사들일 때는 똥값으로 사고, 지들 물건 팔 때는 비싸게 팔아 남들은 죽거나말거나 지들 뱃속만 채워온 게 청풍도가요. 이제부터는 청풍도가에서 우리들에게 지들 맘대로 우리를 조정하며 그리 하지 못할 것이오. 오늘 청풍도가에서 여러분들이 빌려먹고 갚지 못한 쌀을 오늘 몽땅 갚을 것이기 때문이오!”

“옳소!”

“옳소!”

김상만이 일장 연설을 하자, 사람들 사이 여기저기서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물론 그 사람들은 북진본방의 임방주나 동몽회였다. 일반 장꾼들이나 모인 군중들은 아직도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때였다.

“뭣하는 놈들인데 남의 도가 앞에 모여앉아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썩 물러들 가거라!”

청풍도가 안에서 한 무리의 무뢰배들이 쏟아져 나오며 엄포를 놓았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 모인 것은 그동안 억울했던 일들을 성토하기 위해서요. 이보시오들, 억울한 일을 당했던 사람이 있으면, 빚을 갚기 전에 누구라도 일어나 얘기를 해보시오!”

청풍도가 무뢰배들의 엄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상만이 운집해있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뢰배들의 눈치를 살피며 잠자코 관망만 할 뿐이었다.

“이놈들이 어디 한군데 부러져봐야 정신을 차릴라나 어디에서 지랄들이냐?”

“이놈이 날이 따뜻해지니 흙냄새가 맡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청풍도가 무뢰배들이 쌓아놓은 곡식 섬 위에서 운집한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 김상만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사이에 앉아있던 동몽회원과 주변에서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던 동몽회원 수십 명이 일시에 일어서며 청풍도가 무뢰배들을 둘러쌌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청풍도가 무뢰배들이 당황했다.

“백성들 억울한 사정이 있는 백성은 임금님 행차도 막고 고변하는 법인데, 고을민들이 억울한 사정을 토설한다는데 네 놈들이 뭔데 막는 것이냐?”

동몽회 대방 도식이가 청풍도가 무뢰배들 앞으로 나서며 호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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