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득 경상대 명예교수

아포리즘(aphorism)이란 깊은 체험적 진리, 신조, 원리 등을 간결하고 압축적인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로 금언(金言), 격언(格言), 경구(警句), 잠언(箴言) 따위를 이른다. 김규성, 이종수, 신준수, 송선미는 아포리즘을 시의 미학으로 삼고 있다. 작은 서사는 크고도 넓은 담론이 된다. 단순하고 소박하며 어린이다운 동정성과 순진성은 아울러 미니멀리즘이라는 측면도 갖게 한다. 그들은 결코 현실을 말하지 않지만 오히려 현실적이고 파급적인 거대 담론을 지니고 있다.

김규성의 아포리즘은 늙은 호박이다. 늙은 호박은 예로부터 식용과 약용으로 널리 이용되어온 식품이다. 떡, 엿, 범벅, 죽, 나물 등 음식으로 먹고 한방에서는 남과(南瓜)라고 해 산후조리 냉증 감기 중풍 등에 치료약으로도 사용했다.

구덩이에 스러지지 않고

올차고 무성하게

네 꿈을 키우고 살아가느냐?

 

내가 네가 바닥을 기며

높은 담 넘는 세상을 살면서

꽃 피우고 벌을 부르되

근본은 땅에 두고 있음을 잊지 않았느냐?

 

땡볕에 지글거리고

후두둑 장대비 맞으며

한시라도 제자리에서

이처럼 단단하고

야무진 무게로 살았다 할 수 있겠느냐?

 

늙어서 제 곳간 채우기보다

붉게 속 익혀서

은근히 사랑과 깊은 단맛

줄 수 있겠느냐?

- 김규성, ‘늙은 호박’ 전문

이른 봄 호박씨를 쓴 호박잎은 떡잎을 가르며 웃자란다. 웃자란 호박잎은 담장 울타리 나무를 올차고 무성하게 기어오르기도 한다. 호박꽃을 피워 나비와 벌에게 꿀을 나누어 주고 호박잎은 여름날 입맛을 돋우는 반찬이 되기도 한다.

애동호박은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새우젓찌개가 되기도 하고 말린 호박고지는 눈 내리는 겨울날 밑반찬이 되기도 한다. 수행을 거듭하는 젊은 비구처럼 선정을 거듭하며 후두둑 후두둑 쏟아지는 장대비에 전신을 떨며 모진 가뭄도 견디어 낸다. 바닥을 기며 높은 담 넘는 세상을 살면서 근본은 땅에 두고 있음을 잊지 않고 단단하고 야무진 무게를 더해 간다. 무서리가 내리자 호박잎은 시들고 호박은 번뇌 갈등 망상을 벗어나 햇발을 온몸에 받으며 노랗게 해탈을 한다. 은근히 깊은 단맛을 내는 사랑으로 붉게 속을 익힌다.

늙은 호박은 마침내 단맛만 남아 산모의 붓기를 내려 주고 당뇨병자의 당을 내려주고 밤눈 어두운 어린것의 눈을 밝혀 준다. 마침내 공적한 열반에 든 것이다. 촛불을 밝힌 늙은 호박은 열 개의 거울에 불빛을 비추어 중중무진(重重無盡) 중중연기를 거듭한다. 옳고 그름도 없고 막힘과 걸림도 없는 원융무애한 중도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가리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서(恕)와는 등차가 있다.

시에서는 오히려 호박이 시적자아가 되어 나에게 이러한 아포리즘을 일깨워주고 있다. 가을날 흔히 볼 수 있는 늙은 호박을 시로 형상화한 사고 능력과 평이하고도 자유로운 표현 형식은 깊고도 숙성한 맛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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