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본다는 것, 귀로 듣는다는 것’. 그것은 내가 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내가 듣고 싶어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다.

TV 모프로그램을 보면서, 보는 것도 때론 누군가에겐 절실한 문제임을 새삼 느낀다.

각막 질환으로 앞을 볼 수 없게 된 이에게 각막 이식 수술로 새 빛을 불어넣어 주는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다. 앞을 제대로 볼 수는 없지만, 형태와 윤곽만으로 어렴풋이 느끼는 세상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담았다.

각막만 있으면 볼 수 있는 문제지만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고 설명했다.

놀랍게도 수술 후 붕대를 풀면서, “보여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내가 앞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감사했다. 처음부터 내겐 주어진 것들이었기에, 감사한다거나 소중한 것으로 생각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앞이 보인다던 그녀는 이젠 잠자는 시간조차 아까울 것 같다며 감격해했다. 도움을 준 이들에게 후회스러움이 들지 않도록 주변을 돌아보며 열심히 살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선천적으로 하늘이 무슨 색깔인지, 가족들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눈으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그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절실한 것을 나는 어떻게 쓰나 싶을 때는 고개를 쉽게 들 수는 없다. 이기적인 욕심과 질투심, 시기심으로 그것들을 무심코 담고 살지는 않은지….

내가 바라보는 그곳에, 그 마음에 절실함을 보고 있는지 말이다. 하나 더 가졌다고 행복함이 더할 순 없지만, 적어도 앞을 볼 수 있다는 편리한 조건을 가졌기에 그 절실함을 나눠줄 순 없다면, 눈에 사랑을 담아보는 것은 어떨까.

주변 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더불어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면, 평소 예쁘다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소중한 것들로 변해 있으리라.

강서영/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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