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철 수필가

 

 

“아니, 저 차 파란불에도 멈춰서는 이유가 뭐야?”

“그러게, 초보운전 아닐까?”

평화동은 시 외곽 지역이어서 그리 복잡하지 않고 CCTV도 없어 노란 불에도 꼬리를 물고 지나가는 차량이 더러 있는 곳이다. 그런데 빨간색 모닝 차량은 신호등이 노란 불로 바뀌기 전인데도 멈춰 선다. 그 차 뒤를 따라 오던 소나타가 꽁무니를 들이받을 것처럼 하다가 아슬아슬하게 멈춰 서며 고시랑 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반대편 차선에서 본 차 안에는 미모의 여인이 핸들을 잡고 있는 모습이 퍽이나 여유로워 보였다.

신호등을 건너면 복지회관이 있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아버지, 혼자 걷기에는 부담스러운 듯 유모차를 붙들고 서 있는 할머니, 그 외에도 아침을 드시러 가는 듯한 어르신 몇 분이 더 보인다.

“그런데 저 어르신들 어디 가는 거야?”

“몰랐어? 저기 복지회관에서 무료급식을 제공하고 있어.”

“가만!”

“왜, 무슨 일이야?”

“저기 경광봉 들고 어르신들 도와드리는 분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 않아?”

“글쎄, 모자를 눌러써서 잘…”

“잘 봐 여섯시 오 분!”

“맞네! 저 특이한 자세,”

우리 회사 운영실장의 어깨가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어져있어 뒤에서 보면 흡사 6시 5분을 가리키는 듯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철령이와 내가 입사했을 때 실장은 하늘같은 존재였다. 그 앞에 서면 잘나오던 발음도 더듬어지고 실수를 연발하기 일쑤였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실장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그만 알았다’며 제지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업무 처리에 있어서는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치밀하고 냉정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좋은 면 보다는 차돌 같은 냉혈인 이라는 게 운영실장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그런 실장이 남을 위해 봉사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고, 그럴 위인도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집이 이 근처인가하고 생각하는 중에 신호등이 바뀌자 다시 차들은 출발한다. 빨간색 모닝 차량의 여인이 6시 5분을 향해 깍듯이 인사를 하며 지나가자 거수경례로 답을 하는 모습이 무척 멋져보였다.

“두 분이 아는 사이인가?”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우리 실장은 자수성가 한 분으로 알려졌다. 정말인지 아닌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실장의 어깨가 오른쪽으로 약간 기운 것도 어렵던 시절 시골에서 지게질을 많이 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설과, 천연두 예방주사를 왼쪽 어깨에 맞았는데 그게 부작용을 일으켜 오른쪽으로 삐딱하게 고개를 숙이고 다닌 것이 아주 굳어졌다는 설도 있으나 모두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다.

실장의 모습이 새롭게 보였다. 언제나 냉정하고 차돌같이 단단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지나가는 운전자에게 거수경례를 하면서 보인 미소는 천만불짜리였고, 지금껏 보지 못한 일이었다.

우리 회사 힐링 숲 조성공사에 다섯 곳이 신청을 했으나 세 곳은 부실기업이어서 제외시키고 두 업체만을 최종 명단에 올렸다. 이제 운영실장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이 결정하는 일만 남은 셈이다. 애초 계획은 전 구간을 한꺼번에 조성하는 계획을 세웠었는데 윗선의 지시로 짧게 끊어서 실시하기로 했다. 처음 계획대로 하자면 공개경쟁입찰을 실시해야 하지만 나누어서 공사를 하면 수의계약으로도 할 수 있다. 사실 풋내기 나로서는 어느 것이 회사를 위하고 공사비를 줄이는 것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지만 총무과장이 시키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거다.

그 다음 주 일요일 철령이와 내가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가기위해 평화동 앞을 지나는 길이었다. 실장은 오늘도 역시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가 서있는 옆 골목을 빠져나오는 차량이 보였는데 운전자는 지난번 파란불에도 통과하지 않고 서던 빨간색 모닝 차량이었다. 이번에는 오른쪽 샛길에서 나왔는데 신호등을 충분히 통과하고도 남겠는데 미적미적 하다가 정지선 앞에 멈춰 선다. 그리곤 실장을 향해 고개를 까닥한다. 그 모습이 무척 신선하고 애교스럽다. 실장은 거수경례로 답을 하고.

예비 공사업체 두 곳에 대한 서류 심사에 이어 대표자와 현장을 방문하고 공사개요를 설명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업체 대표 중 한분은 여성이었다. 자세히 보니 지난번 교통법규를 철저히 지키던 그 빨간색 모닝 차량 운전자였고 공식 직함은 대명건설 재무이사였다. 우리 실장도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다행스럽게도 그 공사는 대명건설에 돌아갔다. 실장이 그 여자의 질서의식을 높이 평가한 듯 했다.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약간의 하자가 있었지만 원만히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는 운영실장의 호출을 받고 급히 달려갔다.

“이 대리! 우리 회사 힐링 숲 조성공사 변경계획 좀 세워요.”“아니, 이미 결재까지 받은 상황인데 무슨 말씀인지 잘…”“여러 번 나누어서 하니까 아무래도 부실공사 우려가 있고 연결부분도 매끄럽지 못한 것 같아, 그러니까 한꺼번에 하는 것으로 계획 다시 올려.”

누가 실장의 명을 거역하겠는가. 공연히 부아가 치밀었다. 하루아침에 조삼모사(朝三暮四)식으로 변하는 게 역겹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에는 총무과장의 부름을 받았다.

“이 대리! 공사를 어떻게 감독하기에 실장님이 화를 내고 그러나?”

총무과장의 노기가 대단했다. 부하직원이 일처리를 잘못해 직속상관이 궁지에 몰려있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왜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꺼번에 하라고 할 적엔 언제고, 정말 힘들어서 못해 먹겠네.”

총무과장은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는 듯 몰아세웠다. 기가 막혔다. 상사의 지시를 그대로 따른 게 잘못이란 말인가.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힘없이 옥상에 올라 바라본 하늘은 파랗기만 했다. 언제 왔는지 김 대리가 내 어깨를 가볍게 친다.

“오 대리 잘못 아니야. 처음에 그 안을 낸 건 총무과장이잖아. 그러면 자기가 막아줘야지.”

그날 저녁 철령이가 이끄는 데로 어느 술집에 마주앉아서 적잖은 술을 마셨는데도 별로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더 또랑또랑해지는 게 이상스러웠다. 실장은 왜 갑자기 공사 변경을 지시했을까? 하는 의문이 자꾸 들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나와 맥줏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맥주를 시키고 자리에 앉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 차돌 같은 6시 5분이 우리 관계를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횡단보도 정지선에 정확히 정차하는 것까지 계획된 접근이었다는 것도 눈치 챈 것 같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분명 우리 회사 총무과장 이었다. 고개를 살짝 돌려 바라보니 등진 총무과장 앞에는 비슷한 연배의 남자 한명과 빨간색 모닝 차량을 운전하던 여자, 즉 대명건설 재무이사가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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