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얕은 구릉 언 땅이 녹기 시작하고 냉이, 양지꽃 피기 시작하면 겨우내 신었던 털신도 마루 밑 깊이 넣어두고 두꺼운 옷도 옷장으로 들어가는 봄이다. 부쩍 길어진 해에 황토가 부드러워지고 얕은 비에도 온몸이 흠뻑 젖는 봄이다. 일없이 살 찐 누렁소도 활력을 찾고 연장을 손보는 아버지의 손이 분주한 봄이다.

개구리울음 소리 지천이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사랑꾼이 지천으로 울면 시골은 바빠지기 시작한다. 이때는 고추를 심고, 담배를 심고, 각종 밭작물을 심는다.

지난주 사형제가 총출동해 고추를 심었다. 자식들 힘들까 봐 아버지는 벌써 두둑에 비닐을 씌워놓고 고추 몇 고랑도 심어놓으셨다. 두둑 만들기 전 밭에 거름을 내고 객토도 했을 것이다. 낡은 비닐하우스를 손보고 고추 모종도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 온다고 도라지백숙을 한 솥 해놓으시고 ‘더 먹어라, 먹고 해라, 셤셤 해라’ 삭정이 같은 몸으로 연신 걱정뿐이다.

한창때는 누렁소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쉴 틈 없이 분주했다. 비닐하우스에는 담배모종이 커가고 밤낮 어린 자식처럼 돌봤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밭에서 논에서 하루를 보내도 막걸리 한 잔이면 힘이 솟던 시절이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실 줄 알았는데, 한걸음, 한걸음 절룩이는 아버지의 발걸음이 힘겨워 보인다.

김치 갔다 먹어라 성화시다. 간다간다 못가는 아들 때문에 울 엄마 화병 나시겠다. 텃밭에서 상추도 솟구고 아욱도 한 광주리 뜯어 다듬었다. 아욱을 다듬는 엄마의 손이 너무나도 가녀리다. 육 남매 키우시던 광활한 우주도 작아졌다. 그러나 뭐 하나라도 더 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듯 작은 텃밭엔 세상 모든 먹거리로 가득하다. 일 그만하고 쉬라는 자식들의 성화 때문일까 이제 엄마의 우주는 작은 텃밭이 되었다. 가지 몇 그루 심고 손주 오면 주려고 토마토도 심었다. 상추가 끝난 자리엔 또 다른 우주가 심어질 것이다.

도시로 향하는 길. 농사일이 싫어 도시에 나가고 싶었던 어린 시절도 생각나고, 친구 부모님보다 늙은 아버지, 어머니를 부끄러워했던 시절도 생각난다.

그때 부모님도 현재의 나와 같은 나이였을 것인데, 젊은 엄마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 세상 나만 나이 드는 줄 아는 철부지로 살아왔다.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소나무처럼 그런 줄만 알았다. 눈물이 많아지는 나이가 되면서 고랑고랑 새겨진 땀과 눈물이 얼마나 많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오늘은 엄마의 텃밭으로 차려진 저녁을 먹을 것이다. 엄마가 담가준 고추장에 상추쌈을 먹을 것이고, 아욱된장국을 끓일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 도시의 삶은 풍족하다. 엄마의 텃밭에 자주 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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