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옥천에 있는 산성들을 돌아보았는데 성티산성을 답사하지 못해 늘 숙제처럼 안고 다녔다. 길눈이 어두워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용기를 냈다.

성티산성은 말등산과 성재산 사이에 포곡식으로 쌓은 석성이다. 서쪽에 성치산이 있어 성치산성이라 부른다. 그렇게 부르면 대전시 동구 찬샘 마을에 있는 성치산성과 혼동되어 성티산성, 혹은 옥천 성치산성으로 부르겠다.

물과 점심으로 먹을 빵 한 조각을 챙기면서 꼭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자꾸 들었다. 산성 가기 전에 느끼는 엷은 공포감이다. 핸드폰 여벌 배터리, 칼과 라이터까지 챙겨 넣었다. 멧돼지의 공격을 받거나 무너지는 성석에 다리가 끼어 의식을 잃어버리면 어이없이 끝나게 된다.

경부고속도로 옥천 나들목으로 나가서 군서면 아름다운 동평리를 지나 상지리 정자나무 아래 차를 댔다. 개천을 건너는데 다리 아래서 50대 초반 여인이 다슬기를 줍고 있었다. 성티산성을 어디로 가냐고 물으니까 무슨 산성이 있냐고 되묻는다. 마을 사람들도 산성의 존재를 잘 모른다. 은행리 쪽으로 걸어가다 산성이 있는 산기슭에 난 수렛길을 따라 올라갔다. 그런데 묘소에 입석공사를 하느라 경운기가 올라간 길이었다. 산소를 지나치자 길은 없어졌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올려치는 것이다. 2km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깎아 비탈 오르막이라면 더 걸릴 수도 있다. 그래도 올려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다행히 리기다소나무 아래라 잡초가 없었다. 끈질기고 무서운 청미래 덩굴도 산초나무도 없다.

얼굴이고 목덜미고 땀으로 범벅이 된다. 활엽수 마른 낙엽에서 올라오는 먼지 때문에 기침이 자꾸 난다. 생각해 보면 기침도 참 좋은 효과를 낸다. 마을까지 내려오는 멧돼지도 사람의 기침 소리나 쇳소리를 들으면 제가 먼저 피할 것이다. 날망을 하나 지나 내리막길을 조금 내려서니 고갯길이 보였다. 아마도 은행리와 상지리의 연결 고갯길인 것 같다. 아니면 명경저수지에서 성으로 올라오는 길일 수도 있다. 요즘은 야산의 제왕이 된 멧돼지들이 사람이 다니던 길을 다닌다. 멧돼지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은 옛 이야기이다. 다시 가파른 길을 따라 오른다. 산행 들머리부터 짖어대던 까마귀는 아직도 짖어댄다. 어디서 낙엽 밟는 소리가 난다. 사람인가, 짐승인가. 그 때 기침이 나왔다. 망설이다가 일부러 큰 소리로 기침을 했다. 온갖 두려움이 기침을 통해서 밖으로 튀어 나가는 기분이다. 내친김에 옛날 아버지가 새벽기침 하시듯이 가슴에 온갖 탐욕과 두려움을 응어리로 만들어 크게 토해 버렸다. 가슴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탐진치(貪瞋癡)를 다 내품어 버리니 사방이 고요하다. 모든 건 마음에서 이는 것이다. 까마귀가 아무리 악을 쓰며 짖어대도 나는 산을 오른다. 혹시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짖어대는 것일까. 영물에게는 귀신도 보이겠지만 나도 까마귀 소리쯤은 넘어설 수 있다.

이쯤에서 SNS 가족사랑방에 글을 올렸다. ‘성에 간다. 여기는 옥천군 군서면 상지리와 은행리 사이의 성티산성이다’ 딸에게서 금방 답이 온다. “날도 더운데 조심하셔요” 곧이어 이곳이 고향인 며느리가 답을 보냈다. “조심하세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가신다. 참 세월 좋다. 사이버공간의 보이지 않는 줄이 내게 생명 줄이 됐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