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숙 수필가

 

지금 이 시각 나는 한 생명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가느다란 숨 줄기를 붙들고 사투를 벌이는 자그마한 몸체 앞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몸을 쓸어 주는 것 밖에 없었다.

헐떡거리던 숨을 몰아쉬는 순간엔 나도 함께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쉰다.

이미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허공을 헤매고 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다급해진 마음에 큰소리로 이름을 불러본다.

이것이 아닌데…….

이제는 편한 세상으로 떠나 보내줘야 하는데 자꾸 미련이 앞선다.

가쁜 숨을 거칠게 몰아쉬더니 순간 숨소리가 잔잔해진다. 코밑에 손등을 대어보니 희미한 콧바람이 느껴진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세꼼이…. 세번째로 태어난 꼬마란 뜻의 예쁜 이름은 분양해준 착한 후배가 지어준 이름이다.

딸아이가 사춘기와 입시의 힘든 시간을 보낼 무렵 생후 45일된 세꼼이는 선물처럼 우리에게 왔다.

아들은 꼬물거리는 강아지가 무서워  소파 위로 뛰어 올라갔고 딸도 선뜻 손을 뻗어 만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렸을 때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뒷집에서 놓은 쥐약을 먹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 나 또한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세꼼이가 오던 첫 날 우리 네 식구는 아장거리며 다가오는 강아지한테 쫓겨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도망을 다녔다. 세꼼이는 그렇게 우리의 식구가 됐다.

뭐 할 짓이 없어 개 엄마가 되냐고 친정 엄마는 우리 집에 오실 때 마다 잔소리를 하셨다.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털 날리고 왜 사서 고생이냐고 하셨다.

모두 맞는 말이지만 강아지가 주는 기쁨은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도 남았다.

그날 이후 우리가족의 웃음은 기, 승, 전…. 세꼼이가 되었다.

개는 개 일뿐이라는 남편의 이성적인 논리도 까칠한 성격의 아들도 알뜰한 깍쟁이 딸도 세꼼이 앞에서는 무장해제 되었다.

애견인들은 다 그렇듯 누군가 자기 집의 강아지 이야기를 꺼내면 너도 나도 각자 강아지 자랑에 바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핸드폰을 꺼내 강아지 사진을 보여주기에 여념이 없다.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더니 강아지 자랑에 팔불출이 따로 없다.

비애견인인, 모임의 한 언니는 강아지 이야기를 꺼낼 땐 만원씩 벌금을 내라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하기도 한다.

예약된 시간에 맞춰 도착을 하니 까만 정정을 입은 직원들이 나와 정중하게 우리를 맞이했다. 절차에 따라 염습이 끝나고 추모 실에서는 강아지와 이별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제공됐다.

생전의 사진과 간단한 유품들 그리고 천국으로 함께 보내는 가족들의 편지로 추모 실은 슬픔이 가득했다. 15년이란 시간동안 맘껏 사랑하고 충분히 행복 나누고 그리고 슬퍼하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이별 앞에선 다짐도 소용없었다.

화장시작을 알리는 등에 불이 들어오고 우리는 또 한바탕 눈물을 흘렸다.  한 시간 후 분쇄된 한주먹쯤의 골분이 우리에게 전달됐다. 아직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그것을 유골함에 넣으며 세꼼이와 영원한 이별을 했다.

발끝에 매달려 종종거리고 다녀야 하는 아이가 없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만 나면 반사적으로 달려들어 먹을 것을 달라던 아이가 없다.

화장실 패드위에 누렇게 흔적을 남겨놓던, 근처에서 나던 찌릿한 냄새도 없다.

조용해서 좋아야 했고 편해야 했고 깨끗해서 좋아야만 했다.

그런데 다 아니다. 조용해진 집이 너무 허전하고 깨끗해진 화장실이 어색하다.

애견인구 1천만 시대라 한다.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생각한다는 ‘펫펌족’이란 신조어가 등장 할 만큼 반려동물은 가족의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과 동물이라는 생물학적인 구분은 사랑으로 맺어진 이들 관계 앞에선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모든 일에는 정과 반이 있다. 애견인을 이해 못하는 비 애견인 그런 비 애견인들을 또 이해 못하는 애견인,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정을 주고받았던 생물체와의 이별은 너무 아프고 힘들다.

15년 동안의 정을 어떻게 정리해야할까?

집안 구석구석 널려있는 물건들은 모두 그 자리에 그대로 인데…..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