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두꺼운 옷이 얇아졌다. 겨우내 추위를 이겨내던 속옷을 벗고 한결 가벼운 몸이 됐다.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계절, 춘분이다.

아침은 아직 영하의 날씨지만, 머지않아 완연한 봄의 기운이 감돌 것이다. 벌써 산수유는 노란 꽃망울을 터트렸다. 앞다투어 목련, 개나리가 필 것이고 벚꽃도 필 것이다. 그렇게 봄은 찾아오고 있다.

길가 노란 산수유를 보고 벌써 꽃이 피었구나 생각하다 불어오는 바람에 옷깃을 여미었다. 너무 얇은 옷을 입었구나 후회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꽃이 피었다 한들 나에게 봄은 오지 않았다. 사실, 봄은 아무도 모르게 왔다가 짧은 탄성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벌써 여름이야 봄이 너무 짧아. 사람들의 원성을 듣곤 하는 봄.

벌써 겨울이 그리웠다. 너무너무 간절히 겨울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우리는 겨울에는 여름을 그리워하고 여름이면 겨울을 그리워한다. 그리워하다 막상 여름이 오고 겨울이 오면 불청객 취급을 하고 봄을 기다리거나 가을을 기다리는 일로 시간을 보낸다. 생각해보니, 사람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가까이 있을 때는 소중함을 잘 모른다. 이해관계에 따라 자주 만나기도 했다가 소식 없이 멀어지기도 하고 가끔 생각날지라도 안부 묻기가 어색해지는 사이가 되어간다. 최근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을 생각해보니 아내와 아들, 그리고 사무실 동료 세 사람이다. 가족은 그렇다 쳐도 함께 일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나이어린 예쁜 수선화 같은 저 친구의 존재는 무엇일까. 출근 인사를 하고 점심을 먹고 퇴근 인사를 나누고 일주일을 보내고 한 달을 보내고 일 년을 보냈다. 누군가 퇴사하면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존재가 될까.

부부가 함께 세계 여행을 하고 쓴 책을 읽었다. 책은 부부의 눈을 통해 본 풍경을 담기보다는 그들이 만난 사람들, 사람들을 통해 느끼고 깨달은 진솔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저녁이면 광장에 모여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들, 마을의 풍경이 너무 부러웠다. 내 유년의 마을도 이러했다. 저녁이면 마을회관 앞에 동네 형과 누나들, 친구들이 약속 없이 모였다. 마을회관엔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사랑방엔 어르신들이 농사일로 고단한 하루를 정리했다.

겨울이 몹시도 그리운 이 봄날 나는 사랑방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가끔 술 약속을 잡거나 어쩌다 당구를 치거나 하는 거 말고 약속 없이 만나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 저 사람들이 먹먹하게 그리워지기 전에 말이다.

그런 일은, 그런 날은 오지 않을지 모른다. 봄인데 산에 한번 가야지, 들에 가서 냉이, 쑥을 캐다 된장국도 끓이고 화전도 부쳐 먹어야지 하지만 실천으로 옮기는 일은 드물다. 바쁘다는 핑계로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봄을 보내고 말지 모른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너를 만나러 가야겠다. 부디, 나를 밀쳐내지 않길 바라며.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