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영 수필가

 

짧은 겨울 햇살이 산마루를 넘고 있다. 노을은 붉고 산 그림자는 고즈넉하다. 소임을 다하고 나목들의 발치에 누운 낙엽들의 모습이 순하다. 추수를 끝낸 들녘은 나름의 몫을 다한 뒤에 오는 평온함으로 충만하다. 순리를 따르는 그들의 모습이 겸허하다. 겨울은 자연에 있어 쉼이다.

봄여름이 생성을 위한 함성으로 충만하다면 가을은 결실을 내기 위해 옹골차면서도 야무진 모습으로 제몫을 다한다. 반면 겨울은 뿌리를 땅속 깊이 박고 돌아 올 봄날을 위한 쉼에 든다. 소멸로 끝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생성을 위한 쉼이다.

내게도 쉼이 찾아왔다. 자연의 겨울은 세 생명의 잉태를 위한 쉼이지만 내게 다가온 이 겨울의 쉼은 어떤 의미일까.

지난 가을 인생2막으로 시작한 일들에서 손을 놓았다. 몸은 한가해졌는데 마음 둘 곳이 없어 공연스레 여기저기로 서성인다. 시원섭섭하다는 말의 의미가 이런 것일까. 강산도 변한다는 십 수 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면서 힘에 겨웠던 날들도 많았지만 땅의 소중함과 생명의 신비를 알아가는 기쁨이 더 컸던 탓이 아닌가싶다. 결코 짧지 않은 날들을 때로는 버거워하며 가파른 세월의 길목을 오르내리며 그려낸 삶의 무늬들이 떠오른다.

본의 아니게 어떤 상황에 떠밀려 남편이 정년을 조금 앞두고 퇴직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날을 기억한다. 가르치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혼신의 힘을 다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성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한 인간의 삶의 궤적이, 나아가서는 한 가정의 뿌리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절대 절명의 위기였고 아픔이었다. 가슴으로 더운 눈물이 장맛비같이 흘러내렸다. 세상은 내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며 원망하고 또 절망했다. 어떤 결과 뒤에는 보여 지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을 수 있다는 것을 항변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이 나를 못 견디게 했다. 떼어버리려야 떼어버릴 수조차 없는 이들로 해 멍에가 씌워졌다. 죽을 만큼 힘들었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나신(裸身)이 되면 이런 느낌일까.

봄여름이 가고 또 한 해가 가고 숱한 날들을 세상과의 소통이 두려워 웅크리고 있을 때 그런 나를 향해 내안의 또 다른 내가 손짓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주주 물러 앉아 있기엔 남은 삶이 소중하지 않느냐며 채근 했다. 그의 속삭임에 힘입어 한걸음씩 세상을 향해 걸음을 떼어 놓을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상한 심령이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절망의 틈새를 비집고 소망이라는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인생 일 막에 해당하는 시기엔 청소년들을 미래의 주역으로 육성하는 일이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면, 인생 2막을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주어진 일은 어린 애기들을 보듬고 양육하는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일이고, 두 번째 주어진 일은 꽃과 더불어 소일하는 것이 주가 되는 농원을 경영하는 일이었다. 상실의 고통 끝자락에서 우리 곁에 와준 새로운 이 기적 같은 일들은 우리 부부에게 이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세계를 알게 해주었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기틀이 되었다.

어린 아이들과의 만남은 새로운 활력소가 되기에 충분했다. 밤새 잠을 설친 뒤라도 출근을 해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를 듣다보면 잡다한 생각들은 사라지고 마음  속엔 떠들썩한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채워지곤 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 너무 크다고 울던 우준이, 자폐증을 앓고 있는 친구가 머리를 벽에 마구 부딪치고 울 때면 그러면 네 머리가 얼마나 아프겠느냐며 친구를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영민이, 자기도 슈퍼맨처럼 날을 수 있다며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바람에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채준이. 때로는 아이들의 엉뚱한 행동에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 이상의 기쁨을 선물해 주었다.  그들과 만나지 않았다면 애기들만이 줄 수 있는 소소한 기쁨을 어찌 알았겠는가.

농원을 운영하던 날들은 또 어떤 의미였을까. 내 삶의 여정 속에 그 때가 없었다면 아마도 훨씬 삭막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슬이 내려 촉촉한 땅위에 작은 꽃 묘를 옮겨 심기도하고 청량한 아침공기에 취해 스커트자락을 펄럭이며 돌아다니다보면 내 마음이 꽃으로 피어나곤 했다. 초보 농부가 되어 흙과 더불어 살아 낸 날들이 없었다면 햇살과 바람의 속삭임에 따라 무거운 흙덩이를 밀치고 여린 새순이 돋아나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알지 못했으리라.

보통사람들처럼 좀 더 평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어느 이유에선가 그분은 우리에게 그런 삶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왜 그랬을까. 그분께서는 감당할 시험밖에 주시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래서였을까. 이제 모든 시험을 통과(?)하고 여기에 서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하다못해 작은 대추 한 알이 붉게 있어가는 데도 햇살과 비바람, 천둥번개까지 녹아들어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하물며 사람이 한 생을 살아감이 수월하기만 바라겠는가. 부딪쳐 깨지기도 하고 상실의 길목에서 다시 일어서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살아내다 보면 정금같이 단단해 질수 있다는 것을.

무심히 스쳐가는 바람도 그냥 왔다가는 것이 아니라한다. 하물며 인간의 삶에 있어 서랴. 격랑의 시간들을 보내고 쉼을 허락받았다. 고맙고 감사하다. 남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살이가 힘든 이들의 이웃이 되려한다. 혹시라도 삶이 힘들어 갈등하는 이들을 만난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지금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지만 찾고 찾다 보면 길은 열리게 마련이라고. 내가 살아보니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더라고,

이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봄이 올게다. 봄소식과 더불어 쉼에 들었던 대지는 어김없이 땅속 깊은 데에서 새 생명을 밀어 올리리라. 쉼을 통해 비축한 영양분을 공급받은 생명들은 날로 푸르름을 더해 갈게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