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 길  < 주성대학 전임연구원·문학박사 >

11월3일, 학생의 날은 학생독립운동정신을 계승·발전시켜 학생들에게 자율적인 역량과 애국심을 기르도록 하기 위해 지정한 날이다.

53년 10월23일에 국회는 29년의 광주학생운동 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54년 6월10일에는 전국 학도들의 성원으로 발원지인 광주 서중학교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을, 전남여중에 자연석(自然石)기념비를 건립했다.

이후부터 매년 정부는 학생의 날을 기념해 왔으나 73년 유신 치하에 각종 기념일을 통폐합하기 위해 대통령령으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에 의해 폐지됐다가 11년 뒤인 84년에 부활됐다.

이후 정부는 매년 11월3일을 기념일로 정해 교육부 주관으로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학생의 날에 대한 기본정신은 애국과 독립의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애국·독립운동 뿌리 깊어

1929년 11월3일, 전남 광주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번진 학생들의 항일투쟁은    차별교육에서 독립운동으로까지 발전  했다.

이 운동은 3·1운동을 기반으로 체계적으로 조직됐다.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해 동맹휴학을 감행하면서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을 거부하고 민족해방을 요구했다.

광주학생들의 활발한 움직임은 해마다 대규모의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이들은 학교당국에 한국인 교사 증원, 한국사 교육, 한국어시간 증설, 도서실에 한국자료 비치 등을 주장했다.

이로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체제와 차별적 교육체제를 부정하는 항일학생들의 의사를 분명히 표출했다.

이에 일제당국은 임시 휴교조치를 내리고 주동자 체포에 착수해 수십 명을 검거했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총궐기해 구금학생 석방, 식민지 노예교육제도 철폐,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 일본제국주의 타도 등을 부르짖었다.

일제는 신문보도 금지, 주동학생 처단 등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오히려 전국학생들의 연대총궐기로 확대됐다.

11월12일 가두시위 후, 서울 공·사립학교와 시내 요소에 전 국민의 총궐기  할 것을 촉구하고 이 운동은 청주를 비롯한 부산·춘천 등 한반도 각지로 번져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운동에 참가한 학생 수는 보도    에 따르면 5만4천여명, 학교 수는 194개교였고, 그 중 퇴학처분자가 582명, 무기정학 2천330명, 구속자가 1천642명이나 됐다.

학생운동을 지원한 신간회 간부로서는 충북이 낳은 홍명희(洪命熹) 선생 등이 학생운동을 계기로 민중운동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검거됐다.

이 밖에 항일단체 관련자 91명이 체포되기도 했었다.

이러한 역사적 학생운동에 비추어   오늘의 학생·학교를 견주어 보면 고교 등급제·내신성적 왜곡·대학 서열화  등으로 만신창이가 돼가고 있다.

공교육 정상화 방안 시급

그 동안 각 대학들은 애국애족이나  독립정신과는 동떨어진 채, 그렇다고   교육·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도 아닌  학교의 문어발식 기업화와 출신 성분이 우수한 신입생을 선발하기 위한 경쟁에만 몰두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교육의 기본정신은 애국과 독립정신이어야 하며 이를 중심으로 한 전인격적 인간의 배양에 기본을 둬야 한다.

이를 외면하고 교육이 개인의 출세·명예·부만을 쫓는 수단으로 악용되게 학생들을 유도한다면 망국적 교육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루 속히 공교육을 정상화시키기 위한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거리에는 한글보다 외국문자가 즐비하고, 낭비성 조기유학으로 인해 펭귄 아빠, 기러기 엄마들이 늘어나 사랑을 나눠야 할 가족의 보금자리마저 무너져버리는 교육의 모순, 황폐화 시급히 치유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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