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는 끝났네. 나가보게!”

윤 객주가 최풍원에게 나가라고 했다.

최풍원은 눈앞이 캄캄했다. 윤 객주 상전에서 쌀을 얻어가지 못하면 북진본방과 임방들은 장사를 활성화시킬 수 없었다. 청풍도가에 대한 원성이 높은 지금 북진본방이 그 틈을 뚫고 들어가야만 했다. 그 틈을 뚫고 들어가려면 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런데 쌀을 가지고 있는 윤 객주가 대가를 내놓고 가져가라니 줄 것이 없는 최풍원으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최풍원은 쌀 뿐만 아니라 각 임방에서 필요한 물건들도 도움을 청해야 할 처지였다.

“풍원아, 일이 잘 안됐는가 보구먼?”

 윤 객주를 만나고 나온 최풍원의 표정을 살피며 장석이가 물었다.

“객주 어른께서 믿을만한 신표를 보여줘야만 쌀을 내주겠다고 하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네.”

최풍원은 낙심해서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윤 객주가 없었다면 최풍원은 지금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어려운 고비 때마다 구세주처럼 최풍원을 도와주던 윤 객주였다. 실은 이번 충주로 오면서도 속으로는 이번에도 윤 객주가 당연히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임방주들에게도 큰소리 아닌 큰소리를 쳤던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칼자루를 쥐고 있는 윤 객주가 단호하게 거절을 하니 최풍원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진 듯한 충격이었다.

“풍원아, 어떻하냐?”

“그러게, 임방주들도 쌀과 물건을 가져올 거라고 잔뜩 기다리고 있을텐데…….”

최풍원은 아무런 대책이 없으니 낙심천만이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궁리를 해봐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밤새 최풍원은 아무런 묘안도 생각해내지 못했다. 이제껏 무조건 밀어주기만 하던 윤 객주가 북진본방이 정말로 도움을 하는 이때 왜 저러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윤 객주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불신감이 들었다. 다 집어치우고 예전처럼 혼자 행상이나 하며 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지만 그중 한 가지도 문제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객방의 들창이 시퍼렇게 밝아오고 있었다. 윤 객주가 지금 북진본방의 사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최풍원에게 자신이 믿을만한 신표를 보여 달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신표를 요구하는 것이 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언뜻 스쳐지나갔다.

“왕발아! 어서 일어나거라!”

최풍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박왕발이를 깨웠다. “왜 그러시우, 대주?”

어둠 속에서 잠에서 덜 깬 박왕발의 목소리가 들렸다.

“왕발아, 잘 듣거라! 너는 당장 청풍으로 달려가 각 임방주들에게 알리거라!”

“대주, 이 꼭두새벽에 말이요?”

“그래 지금 당장! 각 임방주 통솔 하에 짐꾼 두 명과 쌀 실어갈 소 한 마리를 끌고 충주 윤 객주 상전으로 저녁까지 당도하도록 전하거라. 매우 급하니 잠시도 지체하지 말고 서두르거라!”

최풍원이 박왕발이에게 당부했다.

“대주, 내가 쉬지 않고 달려 점심 전에 모든 임방주들에게 기별을 전할 테니 걱정 마시요!”

말을 마치자마자 박왕발이가 충주 윤 객주 상전을 나섰다. 박왕발이 청풍을 향해 쏜살같이 새벽 어스름 속으로 멀어져갔다. 최풍원이 점점 사라져가는 박왕발이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보았다.

“풍원아, 객주 어르신 기침하시면 한 번 더 청을 해보거라!”

우갑 노인이 최풍원에게 일렀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최풍원이 순순이 그 말을 따랐다.

“유난히 네게 기대를 걸고 있는 어르신께서 저러실 때는 분면 무슨 다른 뜻이 있을게다. 그러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말거라!”

우갑 노인도 어제 저녁 최풍원에게 했던 윤 객주의 처사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최풍원이 서운한 감정을 가질까봐 걱정이 되는 눈치였다.

“어르신 걱정하지 마셔요. 어르신께서나 객주 어른께서 제게 어떻게 해주셨는데, 그만한 일로 서운하겠어요. 그러면 제가 은혜도 모르는 천하에 배은망덕한 놈이지요.”

최풍원이 우갑 노인을 안심시켰다.

“장사라는 것이 득실을 따지는 일이다 보니 때에 따라서 본의 아니게 상대를 서운하게 만드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마다 서운하게 생각하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떨어져나가고 만다. 그러니 절대로 속내를 보이지 말거라. 더구나 임방을 거느리고 있는 대주는 더더욱 속내를 함부로 내비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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