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영 수필가

 

참 희한한 일이다. 사람의 몸도 사용하지 않으면 곰팡이가 생긴다니 말이다. 가까운 지인이 한동안 연락이 없어 괘씸죄를 뒤집어 씌워 다그쳤더니 그간 큰 변고가 있어서였다고 한다. 그의 말인즉 신체의 일부분을 사용하지 않아 그곳에 곰팡이 균이 범람하는 바람에 적출 수술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적출하지 않으면 암 발생 확률이 높다고 해서였단다.

오호 통재로다! 그놈의 곰팡이 놈이 하필이면 여인의 신비하고 오묘한 그곳을 어찌 알고 못된 행실을 벌였단 말인가. 누가 사용하고 싶지 않아서 안했다던가. 마주칠 손뼉이 없어 마주치지 못한 것인데 이는 너무 가혹한 형벌이 아닌가.

명하노니

“에라 이 못된 것아 이제부터는 홀로인 누구의 몸에도 기생하지 말고 썩 물러갈 지어다”

창조주는 사람의 몸을 만들 때부터 ‘몸의 사용설명서’를 첨부하지 않았나싶다. 적재적소에 균형을 맞추어 눈 코 입 등 세밀한 부분까지 만들어 놓은 뒤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명확히 구분해 놓았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얼굴만 봐도 그렇다. 얼굴의 딱 중앙에 코를 만들어 놓고 균형을 맞추어 양쪽에 하나씩 눈을 만들고 코와 일찍 선상에 입이 자리 잡고 있는 것만 봐도 조화롭기 그지없다. 만일의 경우 눈이 양쪽에 있지 않고 한 쪽으로 몰려 있다면, 입이 하나가 아니고 둘이라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겠는가. 두 개의 입으로 먹으려면 손은 또 얼마나 고달플 것이며, 오물거리며 먹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포복절도할 일이다.

혼자서도 주어진 소임을 다할 수 있는 기관이 있는가하면 신체의 어느 부분은 내가 아닌 누군가가 있어 둘이 함께여야만 온전히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창조된 곳도 있다. 아무튼 기기묘묘한 육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서가 유지되고 성패가 갈릴 수 있음은 진리 중 진리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의 몸은 구성도 조화롭지만 각 기관마다 해야 하는 역할 또한 다양하다. 이들이 어떻게 제 소임을 다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입에게 주어진 기능은 어떤 것일까. 참 많은 일들이 입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가장 큰 일 중의 하나는 먹고 말하는 일이다.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만 할까. 어떤 말들을 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먹는 일이 자기가 할일이라고 아무거나 되는 대로 먹어 치우다보면 몸의 균형이 깨지고 탈이 난다. 말하는 기능이 주어졌다고 분별력 없이 3치 혀를 마구 놀리다보면 자신이 쏟아놓은 말들이 올무가 되어 덫에 걸리고 만다.

눈은 또 어떠한가. 눈매가 시원하고 커다란 것은 복중의 복이다. 여기에 심안心眼이 열려 있어 사물을 제대로, 멀리 볼 수 있다면 이 또한 복의 근원이 될 터임에도 이 또한 쉽지 않다. 발도 마찬가지다. 돌아다니는 기능이 주어졌다고, 길이 뚫려 있다고 아무데나 천방지축 나대다보면 깊은 수렁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다.

요놈의 귀가 또 문제다. 좀 둔감해도 좋으련만 무슨 이야기든 더 듣고 싶어 안달을 한다. 팔랑대는 팔랑 귀다 보니 왜 그렇게 잘 알아듣는지 모르겠다.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바람이 실어다주는 말까지 들으려 한다. 그도 저도 여의치 않으면 눈치로라도 들으려하니 이를 어이할꼬!

신이 인간을 창조하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지상 명령이 주어졌다. 여기에는 지켜야할 규범이 아주 많다.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은 자웅동체(雌雄同體)의 기능을 갖고 있지 않기에 서로서로 짝을 이룬 뒤 이를 통하여 사랑하고 번성 하라는 계명이다. 여기에는 절대로 남의 것을 탐해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성스러운 규범이며 삶의 근간을 바로 세워가기 위한 불문율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만홀히 여겨 남의 것도 내 것인 양 천방지축 나부대는 바람에 인면수심의 일들이 난무한다. 어찌 그리 쉽게 내 것을 버릴 수 있는지, 남의 것을 탐하여 빼앗으면서도 일말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무엇이 세상을 소요스럽게 하고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하는가. 이는 아마도 분별력을 잃은 이들이 여과되지 않은 오욕칠정에 눈이 멀어 세상을 어지럽히는데서 오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언론매체를 통해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우리의 심상에 상처를 입힌다. 얼마 전엔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이가 일말의 가책도 없다는 얼굴로 아이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걸 보면 눈을 돌리고 말았다. 뼈와 살을 녹여내어 탄생된 제 분신을 제 손으로 끝낸 사람이라서 그럴까. 인간이기를 포기한, 시의 준엄한 명령을 어긴 이의 목소리가 어찌 그리도 당당한지 소름이 돋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리가 무참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오호! 통재라 이를 어찌 할꼬!

그동안 적조했다는 이유로 몰아세웠던 지인에게 박수를 보낸다. 우리 몸 모든 기관의 소리들을 듣고 통제하는 곳인 마음을 잘 다스려서인가 비록 신체의 중요한 부분을 잃어 버려 심히 안타깝지만 신에게 부여 받은 ‘제 몸 사용설명서’를 귀히 여겨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아서다.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내가 존중받고 세상이 아름다워 질 수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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