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올해는 뗏목 구경을 통 할 수가 없었다. 지난겨울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늘이 잘해야 백성들 사는 게 좀 나질텐테.”

“그러게.”

“뗏목쟁이들은 뭘 먹고 산디야?”

“참나무골 주막거리도 썰렁하겠네.”

뗏목은 강물이 풀리고, 산에 첩첩이 쌓인 눈이 녹아 물이 많아지면 시작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눈이 전혀 내리지 않았으니 강물이 늘지 않으니 뗏목을 띄울 수 없었다. 당연히 뗏꾼들 할 일이 없어지니 덩달아 뗏목으로 북적거리던 진목나루 주막거리도 사람구경 하기가 힘들게 생긴 것은 당연했다. 뗏꾼들 씀씀이는 천석꾼 못지않았다. 뗏꾼들이 이렇게 흥청망청 돈을 쓰는 것은 떼를 옮겨다주고 받는 품삯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뗏꾼의 이력과 떼를 달고 간 양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다른 일에 비하면 견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월등히 많았다. 그렇게 받는 이유는 떼를 모는 일이 매우 위험해서 목숨 값이나 다름없었다. 한 번 떼를 몰고 갔다 오면 머슴 일 년 세경보다도 많은 경우가 허다했다. 뗏꾼들은 그런 목숨 값을 주막에서 닥치는 대로 써댔다. 그러니 뗏꾼들은 주막에서 최고의 손님이었다. 진목의 주막들도 떼돈을 먹고사는 주인들이 대다수인데 올 봄에는 겨울가뭄이 들어 폐점이나 다름없었다.

“풍원아, 사기리로 가지 말고 지동으로 해서 꽃바위로 가자!”

굴바위 쯤에 이르러 갈림길이 나오자 장석이가 말했다.

“아까 백석고개를 넘으면 지동이라고 하니 않았어? 그런 아까 거기로 가지 왜 이제 와서 지동으로 가?”

장석이가 갑자기 길을 바꾸자 최풍원이 미심쩍어 물었다.

“그 고개를 넘으면 동량 지동이고, 지금 가자는 곳은 충주 지동이여. 그리고 꽃바위를 가려면 서운리로 가는 게 편하지만 물을 건너야 하는데, 워쩔 거여?”

“이쪽은 형이 잘 아니까.”

이쪽 지리는 장석이가 잘 알기에 최풍원을 수구리했다.

진목에서 사기리로 해서 서운으로 가는 길은 사기리와 서운 사이를 흐르는 내를 가로질러야 했다. 삼탄이라고도 하는 내는 남한강으로 합쳐지는 지류로 물이 깊지는 않았지만 아직은 얼음 녹은 물이라 뼈를 에일 듯 차가웠다. 짐승도 사람도 맨발로 얼음물을 건너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사기리로 해서 가는 길이 강줄기를 따라가는 길이라 수월하기는 했지만, 물에 발을 넣고 건너가기보다는 조금 팍팍한 길이라도 차라리 상류로 올라가 산길을 따라 지동으로 가는 것이 덜 성가실 것 같아서였다.

지동은 충주군에 속했다. 지동은 종이를 만들던 마을로 종이골, 조골이라고도 불렀다. 이곳은 종이뿐 아니라 쇠잠부락에서는 쇠붙이를 굽기도 했다. 또 마을 뒤로는 명산이 솟아있어 산나물 또한 풍부하게 나오는 곳이었다.

세 사람은 참나무골에서 지동으로 넘어 다니는 마당재에서 방향을 틀어 한수와 동량 사이로 뻗은 골짜기인 싯결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는 지동에서 독지고개를 넘어 손동리를 지나 갯골에 닿았다. 기와골이라고도 불리는 갯골은 꽃바위 상류 강가에 있는 마을이었다. 갯골에서는 꽃바위가 지척이었다.

꽃바위에는 윗꽃바우, 아랫꽃바우로 되어있었다. 봄이 되면 마을 뒤에 있는 바위들마다 꽃이 지천으로 펴 마을이 온통  꽃천지로 되어 불려 진 이름이었다. 꽃바위 마을 한 가운데는 아름다운 이름과는 걸맞지 않게 이백 년 가까이 된 말채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말채나무는 징그러웠다. 그것은 말채나무의 껍질 모양에 있었다. 말채나무 줄기를 보면 흡사 뱀 껍질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말채나무에는 전설도 있다.

아주 옛날 매년 한가위 보름달이 뜨면 천 년 묵은 지네들이 떼로 몰려와 동네 곡식들을 모두 먹어치웠다. 그때 마침 마을을 지나가던 무사가 이 사정을 듣고 말하기를 ‘마을 어귀에 술 일곱 동이를 가져다 놓으라’고 했다. 그러면 자기가 지네를 모두 퇴치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예년처럼 보름날이 되자 다시 마을에 나타난 지네들이 술동이를 보고 정신없이 마시다 취해 모두 잠들었다. 그러자 무사는 술 취한 지네들을 모두 베어버렸다. 그리고 들고 다니던 말채를 지네 죽은 자리에 꽂아놓고 마을을 떠나갔다. 말채는 봄이 되자 새순을 틔우며 크게 자라났고, 이후 지네는 더 이상 마을에 낱나지 않았다. 마을에서는 이 나무가 말채에서 자랐다 하여 말채나무라 불렀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지금도 말채나무 근처에는 지네가 오지 않으며, 말채나무 가지는 잘 휘어져 마소의 채찍으로 쓰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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