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

정호(程顥)는 하남성 낙양 출신으로 송(宋)나라 무렵 도학의 대표적인 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도학의 허무맹랑한 논리를 버리고, 실질적인 논리만을 가지고 그것을 유학에 바탕을 두어 자신의 학설로 정립하였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누구보다 도에 정통한 사람이라고 해서 정명도(程明道)라고 호칭하였다. 

그에게는 한 살 아래인 아우 정이가 있었는데 역시 학문에 뛰어나 둘을 이정자(二程子)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이 두 형제는 인격과 학풍이 아주 대조적이었다. 정호는 융화와 화합을 강조하는 기풍이어서 ‘춘풍화기(春風和氣)’라고 평했고. 아우 정이는 직선적이고 날카로워서 ‘추상열일(秋霜烈日)’이라고 평했다.

정호는 특히 인(仁)을 강조한 학자이기도 하다. 인이란 본래 자애롭고 어진 성품으로 천지만물의 근본이라 여겼다. 예를 들자면 태어난 바탕이 인이라고 하면,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몸이 아프거나 팔다리가 쑤시는 증상들은 불인(不仁)이라고 비유했다. 이는 곧 자신을 알고, 사람을 알고, 천지만물을 아는 것이 인을 바로 아는 것이라 했다.

26세 때에 정호는 진사가 되어, 변경의 지방 관리로 벼슬을 처음 시작하였다. 이후 진청현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백성을 돌보기를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지듯이 하였다. 나중에 조정에서 감사가 나왔을 때 고을 백성들이 정호를 부모 받들듯이 하는 것을 보고는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신종(神宗) 때 조정으로 발령이 났다. 하지만 당시 실세인 왕안석의 신법과는 의견을 달리하여 스스로 지방관을 자처하였다. 이후 사마광이 재상에 올라 다시 정호를 찾았으나 그때는 아쉽게도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말년에 정호는 후학을 가르쳤다. 많은 제자를 두었으나 그중 양시, 유작, 여대림, 사양좌를 4대 제자로 꼽는다. 정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양시와 유작은 나이 마흔에 가까웠다. 이들은 배움을 계속하기 위해 정호의 동생 정이를 스승으로 섬기고자 하였다. 둘이 의견을 같이하여 정이의 집으로 찾아갔다.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 이들은 복장을 단정히 하고 하인에게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그러자 하인이 대답했다.

“선생님께서는 지금 눈을 감고 좌정하여 깊은 명상에 잠겨있습니다. 하오니 들어오셔서 잠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양시와 유작은 대문을 들어서서 함부로 마루에 걸터앉지 않았다. 예를 갖추고 서서 정이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이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한참 뒤에 정이가 명상에서 깨어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 밖에 양시와 유작이 서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눈을 잔뜩 맞아 머리 위에 눈이 소북이 쌓여있을 정도였다. 정이가 뜰을 둘러보았는데 눈이 한 자나 쌓여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스승을 뵙고자 말없이 서서 기다렸던 것이다. 이는 ‘송사(宋史)’에 실린 이야기이다. 정문입설(程門立雪)이란 정씨 집 문 앞에 서서 눈을 맞는다는 뜻이다. 제자가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 또는 배우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비유하는 말로 주로 쓰인다. 우리 시대에는 이런 존경을 받는 스승이 과연 있는가? 부자인 스승만 늘어나는 세태가 아니던가. 눈이 오는 새벽에 문득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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