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공양주 보살을 따라 공양간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 다시 문을 열고 뒤안으로 들어가니 굴이 하나 있었다. 굴 안에는 여러가지 식재료들이 쌓여 있었다. 하긴 이런 곳에 김치 항아리를 두면 자연 냉장고가 될 것이다. 여기 숨어 있으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굴은 깊지 않았다. 들어가 볼까 생각도 했지만 식재료나 항아리 그릇 같은 것이 있어 공양주보살께 미안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굴이라 우선 음습하고 추워 보였다. 가서 웅크리고 앉아서 초라한 왕자가 되어 보고 싶었다. 부여융은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기서 숨어 있다가 잡혀서 부왕과 함께 당나라에 끌려갈 때 심정이 어떠했을까.

왕자는 이곳에 숨어 있다가 소정방의 군사에게 포로가 되었다. 부여융은 여기서 포로가 되어 끌려가서 신라의 왕자 김법민이 뱉은 침을 얼굴로 받아야 하는 치욕을 겪기도 했다. 부왕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도 온갖 수모를 다 겪었다. 부여융은 수모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당으로부터 웅진도독이라는 더러운 벼슬을 하고 복신과 도침 흑치상지의 부흥군을 토벌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그 후 복신과 다른 왕자 부여풍과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고, 부흥군의 명장 흑치상지도 배반해 당의 벼슬을 받고 부흥군과 맞서게 되는 역사적 비극을 만들어간다. 결국 신라는 당과 힘을 합쳐 부흥군의 내부를 분열시키고 스스로 와해되도록 조장한 것이다. 부여융도 당에서 죽어 부왕과 함께 당의 북망산에 묻혔다. 묘지석이 최근에 발견됐다고는 하나 확인할 길 없다.

국가에만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역사가 있다. 자신의 미래를 잠시만이라도 생각했다면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쉽게 결정할 수 있었을 텐데 개인적으로 봐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날 이러한 치졸한 역사를 재현하고 있는 정치인들을 보면 복철지계라는 고사를 생각나게 하는 일이다.

신라는 백제의 왕과 백관을 어떤 생각으로 이민족인 당에 넘겨주었을까. 아무리 무너진 왕가와 백관일지라도 어떻게든 제 땅에서 살게 해주었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처형해 버리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민족의 손에 의해 죽는 낫지 않을까 싶다. 부흥군의 토벌도 당과 연합해 완성했으니 신라는 스스로 통일을 이룬 것도 아니다. 백제의 멸망 과정과 부흥군의 한 맺힌 최후를 보면 1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수치스럽고 마음 아프다.

스님을 뵙지 못해 아쉽기는 했으나 한 가지 마음 속 과제를 해결한 기분이다. 마지막 왕자 부여융이 죄도 없는 죄인의 몸으로 신라군에 의해 포박당하여 내려온 돌길을 나도 걸어 내려왔다. 같은 핏줄에게 잡혀 이민족에게 넘겨질 때 아마도 그때부터 당하게 될 수모를 각오했을 것이다. 수모를 예상하고 그 자리에서 싸우다 죽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후세인들을 이렇게 마음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망스럽다. 역사가 원망스럽고, 그를 잡아 당에 넘긴 민족이 원망스럽고 죽음을 각오하고 당에 저항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비겁하고 우둔한 왕자가 원망스럽고 그가 다시 부흥군을 섬멸하느라 자신의 백성에게 활을 겨눈 말로가 원망스럽다. 어차피 이국에서 떠도는 혼이 되어버린 운명인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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