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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구나무 서기] 베란다
박종희 수필가
2017년 07월 16일 (일) 18:55:45 충청매일 webmaster@ccdn.co.kr
   
   

새 탁자에 밀려 화분받침대가 된 분홍색 사각 탁자 위로 가을 햇살이 금빛 무늬를 짠다. 휴가받아 벼르던 대청소를 하면서 내버려 두었던 베란다 청소를 하려고 보니, 유리창 틈새에 쌓여 있던 먼지들이 제풀에 놀라 일어선다.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볼품없고 쓸모없는 물건들을 버리긴 아깝고, 두자니 눈에 거슬려 보이지 않게 창고에 두다 보니 베란다는 온통 홀대받은 살림들이다. 주택에 살 때보다 큰 베란다가 두 개나 되고, 다용도실도 두 개가 있어 묵은 살림을 정리하기엔 아파트가 참 편리한 것 같다.

비록 안주인의 눈 밖에 나서 베란다로 내몰렸지만, 겨울 한 철엔 남편의 총애를 받던 스키 장비는 그 안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에 터를 잡았다. 남편과 함께 몸살 나도록 시원한 공기와 아름다운 잔디 위에서 호사를 누리며 뒹굴던 골프채와 공도, 이젠 구석진 자리에 시무룩하게 앉아 있다. 매일 아침 운동을 하겠다며 눈앞에 두고 살았던 분홍색 아령도 눈에 띈다. 거기에 오늘은 서재를 뒤져 다 읽은 책이며 지나간 잡지까지 모두 끄집어 내놓았다.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는 늘 쓰지도 않는 허드레 살림을 신주 모시듯 쌓아두셨다. 하다못해 신문지 한 장과 구멍 난 비닐봉지까지도 버리지 않고 서랍 가득 넣어둔 것을 보면 연륜을 쌓아온 분들인 만큼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어릴 때 외할머님 댁에 가면 안채와 떨어진 곳에 큰 자물쇠로 잠긴 ‘광’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 도대체 저곳엔 무엇이 있기에 저렇게 큰 자물쇠를 채워둘까 싶어 궁금했다. 한번은 할머니 따라 광에 들어가 보니 광 안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할머니만의 보물창고였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곳이었다.

솜씨 좋은 할머니와 젊은 날을 고스란히 같이 보낸 앉은뱅이 재봉틀을 비롯하여 한 번도 입지 않는 옷과 시집올 때 해오셨다던 옷감들이 있었다. 아직 찧지도 않은 곡식들, 알이 촘촘히 박힌 육쪽마늘, 제사 지내고 나서 남은 음식과 침을 담근 감 항아리도 있었다. 가마솥에 엿기름을 넣고 고을 때면 종일 군침을 돌게 하던 호박엿 등, 아까워 버리지 못하는 것들과 귀하게 여기시던 물건들이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광에 가득했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할머니 가시는 길에 같이 보내 드리려고 내다 놓았다가 결국은 이모님들이 다시 나누어 들고 왔다. 할머니의 애장품은 내게 흔하다고 모두 천한 것이 아님을 말해 주려는 듯했다.

“버리는 거 좋아하지 말고 놔둬라, 돈 주고 산 건데 나중엔 다 찾을 때가 있다.”라고 하신 어머니 말씀처럼 놓아두면 언젠가는 다 쓸 데가 있고 찾을 때가 있는 것 같다. 그 말씀 얼마만큼 유념하며 살아왔던가. 살다 보면 한 번쯤은 꼭 필요하게 되니 말이다. 다시는 안 쓸 것 같아 베란다 구석에 넣어두고 잊어버렸던 아령을 어머니께 드리려고 며칠 동안 찾으며 화를 내던 남편 앞에 내놓으니 흐뭇해 입이 벌어진다.

쓰지도 않으면서 자리만 차지한다고 하나, 하나 끄집어 내놓았던 물건들이 반듯반듯하게 다시 베란다 수납장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맨 나중에 손에 잡힌 테니스공도 좁은 공간을 메우고 누워버린다. 버릴 요량으로 내놓았던 생각과는 달리 오늘도 우리 집 베란다는 넘치도록 차버렸다. 결국, 아무것도 버리지는 못하고 자리만 바꾸어 정리한 셈이다. 오늘 밤엔 위치가 바뀐 물건들이 나 몰래 웅성거리며 자리싸움이라도 벌일지 모를 일이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베란다를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니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다. 베란다가 없었다면 이 많은 물건을 어디다 두었을까. 오랜만에 정리하고 베란다에 서니 갖가지 추억과 상념들이 꼬리를 잇는다. 어떤 것은 막 결혼하고 신혼집을 꾸몄던 것들이라 내 뒷모습을 보는 듯하다.

베란다 청소를 하면서 우리의 마음속에도 이런 공간 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오늘 나는 내 마음속에도 베란다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채우신 곳간 열쇠처럼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도록 비밀번호도 만들었다.

살림살이를 정리하듯이 기분 좋아지고 행복해지는 기억과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분리했다. 좋은 기억만 가슴 속에 비밀처럼 쌓아두고 생각하기 싫은 일은 쓰지 않는 물건처럼 마음속 베란다에 넣어둘 생각이다. 이젠 내게 얘기치 않은 슬픈 일들이 범람할 때마다 베란다가 마음의 반창고 같은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추억을 음미할 수 있는 마음의 빈터가 되어 주는 이 넉넉한 공간을 어찌 은총이라 아니할까. 새삼스레 내 삶의 어두운 편린들을 뜨거운 애정으로 보듬고 싶어진다.

인간에게 있어 기억이란 것이 없다면 어제의 난 없고 늘 오늘뿐인 인생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기억할 수 있는 뇌를 가진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지금 당장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괴로운 일들이지만, 거짓말처럼 많은 세월이 흐른 후 가끔 기억의 필터를 열어보면 지금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나중에 어떻게 각인되어 있을까.

살아가다 잠시 필요해 베란다를 뒤져 보듯 내 마음을 방문했을 때, 씁쓸했던 일도 세월과 함께 여과되어 추억이란 소중한 이름으로 디자인되어 있을 것 같다. 기억의 필터에 낀 먼지를 열심히 문질러 닦다 보면, 어느새 내 얼굴도 이슬 머금은 새벽의 화초처럼 윤기를 띠겠지. 이 모두가 내 마음속 추억의 장소를 만나 볼 수 있는 베란다를 벗할 수 있는 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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