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동문지는 새로 복원한 듯 정제되어 있다. 문지의 치성처럼 보이는 양쪽 성첩 위에는 키가 비슷한 커다란 참나무가 역시 장수처럼 지키고 서있다. 여기서 내성은 북으로 돌아가고 동문 성벽에서 갈라져 산 아래로 내려가 남문에서 동문으로 오는 한 50m 지점으로 연결되는 것이 외성이다. 동문 성가퀴는 약간 높아서 장대의 기능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다시 남문으로 왔다. 성경을 읽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골똘하다. 그 옆을 지나니 우물이 있다. 우물이 있는 곳은 묘하게 둔덕으로 둘러 싸여 있다. 양철지붕으로 지붕을 했는데 지금은 마시지 못할 것 같다. 물의 양은 많다. 우물을 잘 청소하고 수시로 물을 퍼내면 지금도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올라가면 유금필 사당이 나오고 최근에 지은 성흥루가 있다. 성흥루 위에 봉화제단이 있었다. 봉화제단이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아마 이곳에서 제를 올리는 모양이다. 임천면에서도 4월 말 경에 백제 대제를 지낸다고 하니 그런 제가 아닌가 한다.

다시 동문지로 갔다. 성위의 평지는 700평 정도는 족히 되어 보인다. 여기서 돌아서면 바로 북벽이다. 북벽도 발굴 준비를 하는 것인지, 발굴중인지, 발굴을 끝내고 복원공사를 하지 않았는지 비닐로 덮어 놓았다. 그 부근에 건물지도 있고 우물지도 있다.

거기서 돌아가니 흙에 덮인 북벽 위로 성길이 나 있다. 사람들의 산책로로 한적하다. 남문지 부근은 광활한데 이곳은 숲이 우거지고 이곳저곳에 꽃이 만발하여 은밀한 데이트코스로 적합했다. 성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 사랑나무라 하는지 모른다. 숨이 턱에 닿도록 가파르게 올라가는 곳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다. 북벽 부분도 모두 가파른 산기슭을 이용해 쌓았다.

서문지로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서문지는 복원도 발굴도 하지 않아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주변이 평평하고 역시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성의 모습이 뚜렷한데 이곳은 한쪽면만 쌓은 것이 아니라 양쪽을 다 쌓은 협축식으로 축성한 부분인 것으로 보였다. 성벽의 높이나 성가퀴의 너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너비는 약 6~8m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낙엽이 쌓이고 사람의 손이 간 흔적이 전혀 없다. 유금필 장군의 사당이 다시 나타났다. 성을 한 바퀴 돌아 제자리에 온 것이다. 오늘 가림성 답사는 정말 의미 있었다.

흙속에 묻힌 성을 보는 것은 역사를 보는 것이고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숨소리를 듣는 것이다. 성돌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그들의 날숨을 내가 다시 들이마시는 기분이었다. 사람의 삶은 시대를 초월해도 대동소이하다. 삶의 양식과 문화의 수준은 다르지만 어느 것이 법이고 어느 것이 진리인지는 아무도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한 민족끼리 편을 갈라서 서로 물고 찢고 싸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산성이라는 문화유적은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이고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자산이지만 한편으로 가슴 아픈 과거이다. 쓸데없이 민족의 저력을 낭비했던 흔적이다. 한반도 압록강 두만강 안쪽, 아니면 간도라고 불리는 중국의 동북삼성까지 통일돼 싸우지 않고 살아왔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가 됐을까? 그러나 지금 그나마 반쪽으로 나뉘어 대치되어 있으면서도 그 반쪽마저도 갈가리 찢겨 오늘도 물고 뜯고 찢으며 싸우고 있다.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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