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철 수필가

궂은 날씨가 이어질 때는 방문을 열기도 전에 들려오는 김 상사의 신음을 듣고 그날 기분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조금 덜한 것 같다. 애타는 농심과는 달리 내 마음은 느긋하다. 이 지역에 몇 남지 않은 전쟁 영웅이자 생생한 증언을 해줄 수 있는 어른이다.

나는 국가 유공자를 찾아다니며 잠깐이지만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기도 하고 말동무도 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내가 찾아가서 돌봐드리는 보훈대상자는 한 달에 대략 열두 분 정도, 복합질환이 있는 유공자는 주 2~3회 찾아뵙기도 하지만, 비교적 건강이 좋은 유공자는 주에 한 번 정도 방문한다.

오늘같이 날씨가 좋고 길이 막히지 않으면 운전하기도 좋고 시간이 절약되지만, 눈이 쌓인 어느 겨울에는 평소 20분 걸리던 거리를 1시간 넘게 걸린 일도 있다. 방문 예정시각보다 늦다 싶으면 유공자 어른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혹 오다가 무슨 사고나 당하지 않았나? 해서 집 앞에 나와서 서성거리는 것은 예삿일이고, 핸드폰에 입력해드린 번호로 전화를 걸어오기도 한다.

오늘 오전에 찾아가는 김 상사는 연세가 구순이다. 나는 이 어른을 꼭 ‘김 상사’라고 부른다. 직함 다음에 ‘임’자를 붙여야 마땅하지만, 이 어른이 싫어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부르고 있다.

앓는 소리를 내다가도 ‘김 상사’하고 부르면 정신이 번쩍 드나 보다. 그리고는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영락없이 잘 훈련된, 아니 정신무장이 투철한 신병의 모습과도 같다. 내가 이 어른을 처음 만난 것은 5년 전이다. 하던 사업이 부도나서 집에서 머리를 싸매고 앓고 있을 때 보훈지청에서 보훈섬김이를 모집한다는 내용을 알게 되었다.

어렵게 선발되어 제일 먼저 찾아간 집이 이 어른 김 상사였다. 그때만 해도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 마당을 서성이고 간단한 빨래나 음식 같은 것은 손수 해 드실 정도였다.

처음에는 김 상사가 무척 무서웠다. 무뚝뚝한 말씨, 날 선 눈매가 내 의중을 파고드는 것 같은 섬뜩함도 함께 들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부터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대화를 시작했다. 김 상사는 3년 전 부인과 사별하고 홀로 살아가고 있다. 서울에 있는 아들이 모셔가겠다는 것을 한사코 거절하고 부인이 잠들어있는 고향 마을을 지키는 노인, 총상 입은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는 모습은 보는 사람이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이 어른이 주로 하는 이야기는 다른 유공자처럼 전쟁 영웅담이다. 6·25전쟁에서 혼자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아닌, 어떻게 하면 북한군과의 전쟁에서 이겨 무사히 부대원을 이끌고 부대로 돌아갈까 고심했던 흔적들이 역력하게 배어있는 생생한 이야기였다. 6·25 전쟁 때 그의 계급은 특무상사로서 1개 분대원의 생사를 책임져야 하는 분대장이었다고 했다.

지금은 하극상이 밥 먹듯 일어나고 위계질서가 땅에 떨어져 엉망이지만, 상관의 명령은 곧 법이었고 분대장에게도 총살권이 있었다고 했다. 또 그렇게 엄한 규율을 적용하지 않았다면 스물네 번이나 주인이 바뀐 백마고지전투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며 먼저 간 동료들 생각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아홉 명 분대원이 경계근무를 나갔다가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생사의 갈림길에서는 죽을 각오가 아니면 실행하기 어려운 정면 돌파 작전을 감행했다고 했다. 지금도 그때의 판단이 옳았기에 무사히 사지(死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눈은 무릎까지 빠지고 영하 20도를 웃도는 매서운 추위 속에서 비상식량도 떨어진 상태였다고 했다. 오직 살아서 돌아갈 길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본대로 복귀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김 상사는 아군 복장 그대로 중국말이 유창한 대원을 선두에 세웠다. 검문에서 ‘우리는 특수임무를 띠고 남한 모(某) 부대의 정보를 입수하러 가는 길이며 정확히 세 시간 후에 돌아올 예정이다.’라고 하니 일고의 의심도 없이 통과시켜주더라는 거다. 나는 이 대목에서 그 두둑한 배짱에 또 한 번 놀랬다. 아니 어쩌자고 적진에서 한국군 복장 그대로 검문을 통과할 생각을 했는지 그저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어른이 제일 행복해하는 순간이 전쟁 무용담을 펼칠 때다. 나도 전쟁 이야기를 들을 때는 재미있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6·25전쟁을 겪었는지, 또 수많은 젊은이가 피어보지도 못하고 스러져 갔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되고 또 그들을 위해서는 아니, 당장 눈앞의 노병 김 상사에게 잘해줘야겠다는 생각도 봇물 터지듯 끓어오른다.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다. 오후에는 다른 유공자가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기에 마냥 김 상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한쪽 귀로 이야기를 들으며 손은 구석에 쌓여있는 옷을 주섬주섬 걷어 세탁기에 넣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어느 때는 없는 실력을 발휘해 김치도 만들어다 드리고, 여름철에는 삼계탕 거리를 준비해 가서 끓여드리기도 한다. 그러면 김 상사는 꼭 나에게 돈을 주었다. 받지 않으려고 하면 앞으로 그런 것 해오면 먹지 않겠다며 불같이 화를 낸다. 사실 반찬거리를 가지고 갈 때는 내 돈으로 살 때가 많지만 김치라든가, 여름철 복날을 맞아 삼계탕 같은 것은 사무실에서 협찬받은 것을 심부름만 하는 격이다. 그래도 김 상사는 내 돈으로 사 온 것으로 안다. 아니라고 누누이 설명해도 곧이듣지 않는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으로 받기로 했다. 이일을 사무실에서 알면 해고할지도 모르지만, 김 상사의 성의를 아주 저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올해도 김 상사가 제일 싫어하는 호국영령의 달 6월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철의 삼각지대 전투에서 수많은 동료가 북괴군 총탄에 스러져간 달도 6월이고, 당신의 무릎을 총탄이 뚫고 나간 달도 6월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오늘은 더 우울한 것 같다.

“김 상사! 오면서 보니까 장미꽃이 예쁘게 피었던데 구경 가지 않으실래요?”

“장미꽃! 싫어. 동료들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던 피 같아….”

그의 말은 단호했다. 달리 위로할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담장을 말없이 바라보던 김 상사가 내가 입고 있는 청바지를 유심히 살피다 말고 방으로 들어가 무엇인가 찾는 눈치다. 딸애가 빨아달라고 벗어놓은 것을 급해서 그냥 입고 왔는데 무릎 부분이 찢어지고 너덜거려서 내가 생각해도 어른들 앞에서 입기는 민망했다.

“살기가 무척 어려운가 봐 다 찢어진 옷을 입고 다니게. 내가 바지 하나 사줄 테니 읍내 시장에 좀 같이 가?”

“네? 이 옷이 어때서요. 저 월급 많이 받아요.”

“많이 받긴 뭘 많이 받아. 딴소리하지 말고 어서 나하고 시장에나 가자고.”

이 일을 어쩌나, 거절하면 또 불같이 화를 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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