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충주농고 교장 수필가

해마다 감꽃이 필 때가 오기만하면 고향집 감나무가 생각나고 처참한 6·25동란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누런 군복을 입은 인민군이 순대 자루 같은 식량자루를 어깨에 칭칭 둘러매고 따발총을 들고 감나무 숲을 해치며 나타나 “남조선을 해방 시키려왔다”고 큰 소리를 쳤다. 온 동리는 삽시간에 공포분위기로 돌변했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세상이 바뀐 줄도 모르고 인민군 앞에서 공산당을 비판하는 말씀을 자꾸 하시니 피난 온 사촌형과 나는 두려움에 쩔쩔매다가 “우리할아버지는 아무것도 몰라요”하며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감나무 밑으로 가 “국방군이 아니고 북에서 처내려온 인민군 이래요”라고 말씀드리니 “큰일 날 뻔했구나”하시며 당황해하시던 할아버지의 옛 모습이 생각난다. 잘못하면 말 한마디에 반동분자로 몰리는 세상이니 큰 고통을 당할 뻔했던 아찔한 순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여름 장마가 끝이 나고 고향집 감나무에는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건만 전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공습에 도시는 파괴되고 사람 목숨하나 부지하기도 힘든 세상이 됐다.

추운 겨울이 되자 인민군은 낙동강전투에서 패전을 거듭하고,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이 되자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산골 마을은 패잔병의 은신처가 된다며 미군은 초가집을 전부 불태우겠다고 했다. 부락의 젊은이들은 겨울 피난을 모두 떠났고 부락에 남은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뿐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이 추운겨울에 집을 불태우면 어찌 사느냐”고 무조건 군용트럭의 길을 막고 모두 나가 엎드려 절을 하며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었다. 드디어 통역관이 나타나자 집을 다섯 채 만 돌려놓고 전부 불태우겠다고 하며 작전명령이라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우리 집은 그들이 지정한 다섯 채에 들어가 화마(火魔)는 면했다.

불타는 이웃집에서 불씨가 날아와 사랑채가 불이 붙자 어린 동생들과 눈을 퍼 얹으며 불을 껐던 기억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러한 비참한 일들이 벌어져도 감나무는 살아남아 고목이 됐다. 그때의 감나무는 아니지만 검푸른 감잎만 바라보아도 그날의 참담한 비극에 가슴이 저려온다. 고향집 감나무는 전쟁의 아픈 상처를 안고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지켜왔다. 우리 가족 형제와 함께 잊지 못할 추억을 간직한 채 고목이 됐건만 아직도 남북관계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 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세계적인 압박의 공조 속에도 터널 속을 헤매 듯 앞이 보이지 않는다.

전쟁의 화마가 스치고 간 길고도 잔인한 역사 앞에 감나무 꽃을 보기만하면 추억의 통곡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어찌 그날의 슬픔을 잊을 수 있을까. 누구나 고향이라면 산도 물도 모두 그리워하는 마음에 감나무는 더욱 따듯한 정감을 준다. 그렇지만 전쟁의 참화 속에 애환을 같이해 온 감나무에 꽃이 필 무렵이면 아득한 옛일을 생각하고 꿈속에 어른거리는 슬픔에 젖어든다. 남북이 가로막혀 한 맺힌 슬픈 마음의 응어리를 가슴에 품고 한평생을 살아가는 민족이 이 세상 아니 이 지구상에 어디에 또 있을까. 아, 언제 이 땅의 평화와 통일이 올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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