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남문지는 서벽에서 동벽으로 돌아가는 모서리에 있다. 동벽으로 돌아가는 곳이 일부 치성의 기능을 가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를테면 남문에서 동벽이 전혀 보이지 않아 서벽을 공격해오는 적과 동벽을 공격해오는 적이 상호 소통도 어렵고 한 명의 장수가 한 번에 지휘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반면에 아군은 한군데서 동벽과 서벽을 지키는 군사에게 한번에 작전을 하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참으로 백제인의 지혜를 한눈으로 보는 듯하다. 남문 부분이 치성처럼 남쪽으로 튀어 나와서 남으로 대조사 쪽 비교적 완만한 능선을 타고 올라오는 적을 막아내기에도 용이해 보였다.

남문으로 들어가니 성안은 매우 평평한 광장이다. 성은 전체적으로 광장이 있고 내부로 장대처럼 높은 곳이 있다. 그러나 사람이 쌓아서 만든 장대는 아니고 산봉우리이다. 그러니까 성이 한 8부 능선 쯤에서 봉우리에 테를 두르듯 쌓은 것이다. 남문지를 다시 나와서 동벽으로 돌아갔다. 이미 복원한 부분을 한 50m쯤 지나 구부러진 성벽이 나왔다. 이곳에서 성벽이 바깥쪽으로 일부 튀어 나와 있는데 외성으로 가는 흔적으로 보인다. 여기서 능선을 타고 골짜기를 계란 모양의 타원형으로 안고 돌아 다시 동문 쪽으로 올라오는 것이 외성이다. 외성의 규모는 약 870m정도라 한다. 모롱이를 돌아가니 한 80~100m 정도 발굴 조사하는 곳이 보였다. 다행히 공휴일이라 지키는 사람이 없이 비닐 끈으로 접근 금지선만 표시해 놓았다. 접근 금지 안내판은 없다. 다리가 긴 나는 서슴지 않고 넘어갔다. 조금 양심에 걸리기는 했지만 나도 백제 역사 발굴 조사단에 버금갈 만큼 백제를 사랑한다.

이곳은 2011년에 1차적으로 발굴조사를 하고 2015년에 2차로 발굴조사를 했다고 한다. 여기도 서벽과 마찬가지로 경사가 심한 산비탈에 산 모양을 이용하여 성벽의 기능을 극대화했다. 저 끝 동문지로 보이는 곳까지 서벽과 같은 방법으로 외벽은 석축하고 안쪽은 흙으로 채우는 내탁외축법으로 축성했다. 돌의 모습은 매우 일정하다. 작은 돌은 작은 돌끼리 바른층쌓기를 하고, 큰 돌은 작은 돌의 두 배 정도로 다듬어 가로줄을 맞추었다. 물론 큰 돌끼리 쌓은 곳도 있다. 쌓는 방법이 매우 정교해 흙속에서 1500년을 견뎠어도 돌과 돌 사이 틈도 없다. 아마도 성 내부에서 흘러내린 흙에 성벽이 덮였을 것이다. 전체 성벽이 고스란히 남은 곳은 아무래도 높이가 5~6m는 되는 것 같고 무너진 부분도 최소 3m 정도는 남아 있었다. 이곳에 파헤친 흙 사이로 기와편과 토기편이 즐비하다. 그만큼 큰 건물이 많이 있었고, 상주한 군사나 인력이 많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발굴하는 곳을 지나가며 사진만 찍고 정말 돌을 만져보고 싶은데 참았다. 흙 한줌이라도 연구하는 분들의 의도와 다르게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성돌과 성돌 사이에서 문화재가 나올 수도 있다. 명문이 있는 토기편이나 기와편 혹 인골이라도 나온다면 백제의 역사가 일부 바뀔 수도 있다. 정말 감개무량하다. 눈물이 날 지경이다. 발굴공사를 하기 위해 중장비가 드나든 곳이라도 내가 밟는 것이 미안해 조심조심 밟았다. 동문까지 가서 되돌아보았다. 감회가 깊다. 이곳에서 있었을 1500년 과거를 상상해 본다. 아우성, 함성, 외마디 소리, 나팔소리, 호각소리 북치는 소리가 마구 들려나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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