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그래서 나는 행복하였네라. 그리하여 나는 기꺼이 눈물을 바치나니.

행복이란 단어는 참 흔하다. 그리고 흔하게 사용한다. 그러나 정작 지금 행복한가 물어보면 정확히 대답하기 어렵다. 슬프고 우울하고 화나는 일 많은 현대사회에서 행복을 찾기란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다. 최근 행복지수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된다.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스스로 측정하는 지수’라고 하는데 행복지수 1위를 차지하는 나라들을 보면 경제적 요건보다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행복이 돈이나 물질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필요하다는 방증일 것이다. 최근 발표를 보면 노르웨이-덴마크-아이슬란드 순으로 행복지수가 높고 한국은 56위에 올라있다. 복지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북유럽과 서유럽 국가들이 높은 지수로 나와 있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피파랭킹과 비슷한 세계 56위이니 이만하면 높은 순위라 여겨진다. 

우리는 언제 행복을 느낄까. 사람마다 삶의 목표와 가치가 다르듯 행복의 기준도 다양할 것이다. 대체로 가족의 행복과 경제적 부의 축적, 사회적 지위 향상 정도가 공통적인 목표일 것이다. 더 좋은 차와 더 좋은 집, 더 좋은 교육환경이 대부분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또는, 행복의 기준이 다른 이와의 비교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닐진대 불행하게도 우리의 경우는 남과의 경쟁과 비교위의를 통해 행복의 가치가 결정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가치를 지니지 못한 몇몇 사람은 하나같이 돈 버는 일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뿐이다. 부가 행복의 기준이라면 경쟁에서 살아남을 힘을 기르라고 권하고 싶다.(이 대목에서 혼자 웃음) 

이 외에 사회적 요인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최근 많은 사람이 기쁨과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있다. 제19대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에 울고 웃는 날이 많아졌다. 내 일처럼 같이 기뻐하고 같이 울었다. 사람 사는 세상, 살 맛 나는 세상에 내 일 네 일이 따로 있을 리 만무하다. 이런 날이 또 올까 싶을 정도로 나날이 명절 같다.

어릴 적 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을 보며 울었다. 최초 자본으로 제조된 눈물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슬픔의 눈물을 흘렸고 연인과 헤어졌을 때 아픔의 눈물을 흘렸다. 故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 행렬을 지켜보며 슬픔과 아픔과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 자식이 태어났을 때는 감동과 환희의 눈물을 맛보았고 세월호 사건을 지켜보며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렸다. 요즘은 잘 마른 빨래를 개며 알 수 없는 눈물이 난다. 그러고 보니 행복의 눈물을 흘린 기억이 없다. 행복하면 웃어야지 울 필요가 없기 때문일까. 어쩌면 행복이란 행복 이외의 감정에서 자유로울 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플라톤은 행복의 조건을 이렇게 말했다. ‘먹고 살기에 조금은 부족한 듯한 재산,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엔 조금 부족한 외모, 자신이 생각하기에 절반만 인정받는 명예, 남과 겨루었을 때 한 사람에게는 이기지만 두 사람에게는 이기지 못하는 힘, 연설할 때 청중의 절반 정도만 박수를 보내는 말솜씨’ 그래서 나는 행복하였네라. 그리하여 나는 기꺼이 눈물을 바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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