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동성왕은 웅진천도 초기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부여나성, 우두성, 사현성 등을 축조하면서 가림성 축조공사도 시작한다. 이때 16등 관직 가운데 가장 높은 품계인 위사좌평 백가를 보내 관리하게 했다. 그런데 축성이 완성되고도 백가를 조정으로 부르지 않고 가림성의 성주로 두었다. 백가는 앙심을 품고 사비성 서쪽 들판에 사냥 나온 동성왕을 자객을 보내 살해하고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결국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에 의해 백가는 목이 베어져 백강에 고기밥이 됐다고 한다.

백가 반란군의 사연이 남아있는 가림성은 부여군 임천면의 성흥산 정상부에 있는 테메식 석성이다. 사비도성의 남쪽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 중의 요새이다. 부여에서 논산을 동남쪽에 두고 서천, 군산으로 가는 길목이라고 하면 좋을까? 말하자면 임존성, 학성산성, 장곡산성이 사비성의 북서쪽으로 예산에서 홍성으로 뻗은 산줄기에서 서쪽을 방어하는 산성이라면 가림성은 금강의 하구에서 올라오는 적을 방어하는 산성이다. 나의 산성답사가 연기 주변의 산성으로부터 서천에 이르는 산성까지라고 한다면 건지산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성이다.

가림성을 반드시 답사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은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에서 나온 ‘백제부흥운동사연구’를 읽고 나서부터이다. 백제부흥군 섬멸이 급한 신라 문무왕은 직접 28명이나 되는 장수를 이끌고 당의 장수 유인궤와 웅진성에서 작전회의에 들어갔다. 그들은 백제부흥군의 본부인 주류성(현재 임존성이라고 가정)보다도 외곽에 있는 임천의 가림성을 먼저 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가림성이 수륙의 요충지이므로 이를 내버려두고 주류성을 쳤을 경우 부흥군에게 뒤를 얻어맞을 것이 우려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의 유인궤가 이것을 반대하면서 가림성보다 주류성을 공격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가림성이 워낙 험하고 견고하므로 많은 사상자가 나올 수 있고, 주류성이 백제부흥군의 심장부이므로 이를 공격하여 항복시키면 다른 성들은 자동으로 항복해 온다는 주장이었다. 유인궤는 손자병법에서 ‘피실격허(避實擊虛)'를 주장해 ‘실(實)' 즉 가림성을 피하고 ‘허(虛)' 즉 주류성을 친다는 의미이다. 유인궤의 주장은 예상대로 들어맞아 주류성에서 대패한 부흥백제국은 이때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663년은 부흥백제국의 시련의 해이다. 이해 백제부흥군은 백강전투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고 임존성이 함락되었다. 임존성의 함락은 포로가 된 백제부흥군의 흑치상지장군을 통해 이이제이以夷制夷 작전을 쓴 것도 당의 유인궤였다. 이렇게 임존성이 함락됐어도 가림성은 671년까지 부흥군이 남아 끝까지 저항해 신라를 괴롭힌 역사적 흔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가림성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출발 1시간 30분만인 오전 9시40분경 부여군 임천면 소재지에 도착했다. 조용하다. 장터였던 곳인지 공터가 있다. 가림성에 주차장이 있다고 하지만 걷기로 했다. 대조사를 지나는 포장도로에 벚꽃이 지느라 바람이 불 때마다 나비 떼처럼 하얗게 날아와 달려든다. 올라가는 길목에 유금필 장군의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를 지나 주차장 부근 커다란 바위벽 앞에 가림성 지표조사 안내판이 있어 가림성의 개요를 미리 알 수 있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