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충북중앙도서관 목각강사

조선 15대 왕으로 15년간 재위한 광해군 시대에 두 사람의 허씨가 등장해 뚜렷한 족적을 남긴다. 드라마의 소재로도 채택돼 방송 됐을만큼 후대까지 이름을 날리고 있다.

‘동의보감’이란 책을 편찬한 어의 허준은 조선시대 가장 아래에서 시작해 최고의 신분 상승을 이룬 사람으로 그가 책을 완성하자 왕은 그 책을 왕조실록만 넣어두는 사고에 보관시킬 만큼 자랑스러워했다

또 다른 허씨는 ‘홍길동전’의 저자로 유명한 허균이다. 어머니가 탄생한 강릉 사천 애일당 외가 뒷산 이름을 따 ‘교산’ 이란 호를 가진 그 50평생이 파란 만장의 연속이었다.

조선 왕조가 끝날때까지 복권이 이뤄지지 못한 그의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관과 학문관을 피력한 시대의 선각자적 사상은 왕권을 위협하는 혁명적 발상이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업적은 남아 그 시대의 별로 살아 있다. 강릉 경포대 입구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두부로 유명한 초당 마을 수만평 소나무 숲에 남아 있는 난설헌 생가가 있다.

그의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동인의 영수로 경상도 관찰사를 했으며 아들 허성, 허봉, 허균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류시인 허 난설헌이 누이가 되니 ‘어찌 하늘은 한 집안에 이렇게 글 잘 하는 이들을 몰아 주었는가’하는 유성룡 대감의 감탄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조선 문예부흥의 군주 정조가 아끼던 규장각 도서에 남겨진 ‘성소 부부고’,‘국조시산’,‘장산인전’ 등은 왕조로서 기피인물 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학문적 업적은 감출 수 없음을 증명한다.
괴산 제월대에 남아있는 글씨를 쓴 중국사신 주지번의 서문이 붙은 그가 만든 ‘난설시집’도 지금까지 살아남아 누이의 천재성을 전해주고 있음은 그의 잡초같은 생명력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1601년 12월20일 그의 일기에 청주에 와 목사 서인원과 만났던 것이 기록돼 있다. 1617년 정2품 좌참찬에 올랐으나 이듬해 기준격의 상소로 옥에 갇혀 있던 중 간신 이이첨이 광해군을 협박해 8월24일 능지처참됐다.

한 시대의 가슴 아픈 천재가 남긴 책 두권을 바라보면 애틋함이 샘물처럼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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