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시인 충북예술고 교사

저는 아파트에 삽니다. 전망이 가려지는 것이 싫어서 맨 앞 동만을 찾아다니다가 맨 뒷동에 구경 갔더니 뒤쪽으로 트였더군요. 그래서 그리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아파의 앞쪽은 앞 동 건물입니다. 그 앞의 앞도 아파트이고 그 앞의 앞 동으로 가야만 전망이 탁 트면서 멀리 산들이 보입니다. 시원하죠. 책이란 먼 산을 가리는 고층 건물들입니다. 그렇다면 먼 산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진리죠. 진리에 이르려면 책이 무엇을 가리는가 하는 것부터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진리에 다가가려고 책부터 집어듭니다. 그리곤 진리로부터 자꾸 멀어집니다. 진리라는 망상만 머릿속에 가득 담죠. 책으로 쌓아올린 고층빌딩만 치우면 먼 산은 저절로 눈에 다가듭니다. 사시사철 자신만의 색깔로 장중한 교향악을 연주하죠. 그것을 보지 못하도록 가리는 것이 바로 책입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가 책에 의존한다는 것이 참 역설입니다. 그것도 불변의 진리를 담았다고 <경>으로 떠받들면서 그것을 달달 욉니다. 과연 그런다고 창시자가 말한 진리가 내게 다가올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창시자의 말조차 버리지 않으면 진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말을 버려야 진리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책이란 진리의 측면에서 보면 그릇된 길만을 보여주는 매체입니다. 종교에 관한 글이 효용성을 지닌다면 그것은 방편으로 쓰일 때뿐입니다. 글이 방편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것이 어떤 사실을 전한다고 착각할 때 길은 미궁 속으로 빠져듭니다.

한형조의 책 ‘왜 동양철학인가’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얼마 전에 썼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이곳에 소개할까 말까 많이 망설였습니다. 이미 앞의 책에서 지식과 진리에 대한 소개는 어느 정도 정리될 듯싶은데, 굳이 다시 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책은 불교의 금강경을 소개한 글입니다. 너무 깊이 들어가면 오히려 방해가 될 듯 싶은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러다가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지은이의 책을 읽어보니, 언어가 주는 장벽을 넘어섰더군요. 빌딩 숲 너머에 있는 먼 들과 산을 바라보는 시각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소개하는 중입니다. 저는 불교에 대해서 될수록 아는 체를 하지 않으려고 해왔습니다. 특히 간화선이니 화두니 해서, 우리나라의 불교가 지나치게 어려운 말장난들이나 하고 있고, 세상을 등지고 절간에 틀어박혀서 무엇을 하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그들에 대해 굳이 제가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어야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책에 이런 저의 생각에 대한 작은 해법이 담겨있는 듯도 해서 소개하도 무방하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중들의 밥값과 우리네 같은 때절은 사람들의 밥값은 다를 것입니다. 아니 달라야 합니다. 자기네 조상이 지눌이냐 보우냐느니, 돈오가 맞느냐 점수가 맞느냐느니 하는 허무맹랑한 말싸움으로 요란 떨 게 아니라, 진리의 샘물을 때 묻은 속세에 끊임없이 퍼주어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부질없다고 해놓고서는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중들이 해야 할 밥값을 엉뚱한 속인 하나가?하고 있길래 한 마디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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