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숙 수필가

출근길의 전철역 풍경은 마치 전쟁터 같다.

늦잠을 자 허둥지둥 달려 나온 학생, 지난밤 과음으로 아직 부스스한 머리를 털어내며 나서는 직장인, 등산배낭을 짊어진 중년의 가장 등 갖가지 표정들이 저마다의 틀 속에서 몸부림 치는 현장이다.

그 길 한가운데 느릿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각자의 한 손은 지팡이를 짚고 나머지 한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두 노인의 뒷모습이었다.

옷차림도 비슷했고 걸음걸이, 키 까지도 비슷했다.

어찌나 다정스레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지 바쁜 걸음으로 지나치려던 나는 잠시 보폭을 맞추며 천천히 걸었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연신 미소를 지으며 상대편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돌려 눈빛을 맞추며 걷는 중에도 잡은 손은 놓지 않는 모습이 참 좋아 보였다.

전철 도착시간이 임박해 더 이상 걸음을 늦추지 못하고 옆을 지나쳐 역사를 향해 잰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앞에서 뒤를 돌아보니 두 분 다 족히 80대 후반은 되어 보였다. 깊은 주름에 거뭇거뭇한 반점이 시간의 흔적을 말해 줬지만 두 분의 미소는 세월, 그 너머에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벗.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을 벗이라 한다. 또한 사람들이 늘 가까이 하여 심심함이나 지루함을 달래는 사물도 벗이라 칭했다. 같은 의미로 친구도 있지만 벗이라 하면 왠지 오랜 세월 뭉근한 감정을 녹여낸 듯한 느낌이 들어 훨씬 정스럽다.

‘벗을 삼다’. ‘벗하다’. ‘벗을 트다’는 말들은 사람들의 만남에서 서로 허물없이 지내고 그럼으로써 서로 서먹서먹한 높임말을 쓰지 않으며 터놓고 지내는 사이를 일컫는다.

한자로 벗(友)은 왼손과 오른손을 맞잡고 서로 도우며 더불어 친하게 지낸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벗을 ‘또 다른 나의 반쪽이며 제2의 나’라고 하였고 연암 박지원은 ‘피를 나누지 않은 형제’ 라고 하였다.

누구에게나 가슴 속에 지울 수 없는 벗의 모습과 그들과 나눈 우정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우정을 나눔에 있어서는 국경과 신분을 뛰어 넘는 많은 예들이 있다.

공주 목사로 부임한 허 균은 서얼 친구인 이재영에게 편지를 보낸다. 목사로 부임했지만 어렵게 사는 친구를 생각하면 밥상을 대할 때 마다 땀이 나고 밥을 먹어도 목엘 넘어가지 않는다했다. 자기의 봉급의 반을 덜어 생활을 책임지겠으니 곁으로 오기를 청한다.

이재영은 과거 때 마다 남의 글을 지어 주어 그의 글을 받아 급제한 사람이 대여섯은 될 만큼 글 솜씨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허 균은 이재영의 재능을 알아보고 신분의 차이를 넘어 그와 오래도록 격의 없는 우정을 나눈다. 수시로 편지를 보내 속내를 털어놓으며 내면을 공감하는 벗으로 함께한다.

또한 박지원은 똥을 져 나르는 역부를 ‘덕’이 있는 선생으로 부르고 이러한 사람들과 벗하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우정을 실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박지원의 ‘예덕 선생전’는 이런 대목이 있다.

“무릇 시장에서는 이해관계로 사람을 사귀고 면전에서는 아첨으로 사람을 사귄다. 따라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세 번 손을 내밀면 누구나 멀어지게 되고, 아무리 묵은 원한이 있다 하더라도 세 번 도와주면 누구나 친하게 되기 마련이지. 그러므로 이해관계로 사귀게 되면 지속되기 어렵고, 아첨으로 사귀어도 오래갈 수 없다 훌륭한 사귐은 꼭 얼굴을 마주해야 할 필요가 없으며, 훌륭한 벗은 꼭 가까이 두고 지낼 필요가 없다. 다만 마음으로 사귀고 덕으로 벗하면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도의로 사귀는 것이란다. 위로 천고(千古)의 옛사람과 벗해도 먼 것이 아니요, 만 리나 떨어져 있는 사람과 사귀어도 먼 것이 아니다”

사실 인생에서 참다운 우정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오랜 시간 우정을 유지하며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인생의 마지막 지점, 두 손을 꼭 잡고 걸어가던 두 노인은 어떤 인연으로 만난 벗일까? 관포지교란 말이 생각났다. 배려와 존중보다는 경쟁과 배제의 분위기에 살고 있는 우리 가운데 관중과 포숙처럼 벗과의 소중한 만남을 기억하고 유지하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될까?

나에게도 소중한 벗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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