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건지산성 안에 남아 있는 유일한 건물은 봉서사이다. 건지산성 안에 사찰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산성과 사찰의 연관성이 궁금했었다.

사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경내로 들어갔다. 진입로는 아름답고 아늑하다. 평화와 안락이란 이런 것일까. 들머리에 일주문 대신 한글로 ‘봉서사’라고 새긴 커다란 오석을 세워 놓았다. 안내판에는 한자로 병기해서 봉이 머물러 사는 절이라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분명 풍수설에 따른 이름일 것이다. 건지산은 봉황이 알을 품은 형국이라든지 하는 의미를 생각하며 경내로 발길을 옮긴다. 밖에서도 다 보이는 가람은 주변의 아름드리 소나무와 어울렸다. 몇 걸음 더 옮기니 커다란 느티나무가 사천왕처럼 부처님을 시위하듯 지키고 있다. 가운데 크게 두 그루가 있고 양쪽으로 작게 두 그루가 더 있어서 균형이 딱 맞았다.

절은 작고 아담하다. 마당에서 기단을 2층으로 쌓고 계단을 10개쯤 만든 다음 그 위에 극락전을 모셨다. 절 마당에서 계단을 한참 내려서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가 가정집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극락전은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단청을 새로 했는지 깨끗하고 아름답다. 극락전 뒤편 언덕에 진달래가 한창이다. 주변의 소나무와 진달래가 어울려 서방정토에 이른 듯하다. 극락전에서 왼쪽으로 조금 오르면 삼신각이 있는데 올라가지는 않았다. 극락전이 있고 아미타부처님을 본존불로 모신 것도 백제 부흥군의 명복을 기원하는 의미일 것이다. 건지산성을 운주산성, 장곡산성, 임존성과 아울러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격전지인 주류성으로 주장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마당에서 만난 스님께 합장하고 극락전으로 올라갔다. 본존불인 아미타부처님의 인자한 미소는 모든 대중을 가슴에 품는 듯했다. 보물 제1751호인 서천 봉서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舒川 鳳棲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은 17세기 이름난 조각승인 수연(守衍)이 제작주라고 발견된 발원문에 전해진다고 한다. 부처님은 턱이 짧고 두툼하며 넓적한 얼굴에 코가 도톰하고 인중이 짧아 중후하면서도 개성 있는 상호이다. 17세기에 제작된 다른 불상처럼 대중적이고 담담한 아름다움에다가 중량감이 있어 거룩하다기보다 친근감이 앞선다. 삼배를 드리고 조용히 법당을 나왔다.

봉서사는 석북 신광수, 월남 이상재, 석초 신응식이 들어와 공부했던 절이라고 안내판이 설명하고 있다. 절 마당에서 오른쪽으로 건지산성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보였다. 오솔길로 오르는 길에 누구를 기다리는지 무슨 소망을 이루려는지 노란 수선화가 아름답다. 부처님의 세계는 어디가 끝인지 가늠할 길 없다.

이상재를 비롯한 세 분의 사적 이외에 백제 부흥군과 관련된 설화는 전해지지 않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절이 백제 멸망 직후나 백제 시대에 창건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는 절을 옮겨 왔다는 설도 있고, 그 전부터 있었다는 설도 있어서 창건의 역사가 모호하다. 운주산 비암사가 백제 유민이 부흥군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고, 비암사를 비롯한 연기 지역 고찰에서 불비석이 발견된 것과 많이 다르다. 절집 주변에 건물터가 많이 있는 것으로 봐서 분명 사연은 있을 것이다. 사연은 뒤로하고 건지산성으로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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