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조정에서는 그들을 어쩌지 못했다. 불법을 저질러도 눈을 감아주고, 특혜를 주고, 오히려 탐관오리의 비리를 고변한 백성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매질을 했다. 하기야 임금의 특명을 받고 파견된 암행어사조차 백성들을 등쳐먹은 지방관의 탐학을 탄핵했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아 귀양을 가는 어처구니없는 세상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미물만도 못하게 여기는 백성이야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조정의 고관대작들도 자신들이 받아먹은 뇌물이 있으니, 탐학하여 백성들 원성이 극에 달해도 관리들을 비호하기만 할 뿐이었다. 조선팔도에서 백성들을 위해 선정을 베푸는 관리를 찾는 것은 씨앗도 뿌리지 않은 밭에서 싹트기를 바라는 일보다 어려웠다. 관리들의 덕을 보느니 차라리 있지도 않은 손자 환갑  잔치를 얻어먹는 것이 더 쉬웠다. 그러니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좋아지기는커녕 해가 더해갈수록 궁핍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덕헌이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닌 끝에 내린 결론은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은 무능한 조정과 외척들의 세도정치, 그리고 지방 관리들의 탐학에 있었다. 또한, 백성들의 힘겨운 삶의 근저에는 이제껏 조선을 지탱해왔던 신분제도와 그로인한 백성들의 종속적인 사고방식에 있음을 간파했다. 더구나 어린 순조의 등극으로 수렴청정과 외척의 세도 정치가 득세하자 왕권이 약해지며 조선의 통치제도는 급격하게 문란해졌다. 조선은 관직뿐 아니라 신분까지도 돈으로 사고팔아 열에 여덟은 양반이었다. 그러니 상민 둘이 여덟 명의 양반을 모시는 꼴이었다. 처처에 양반만 버글버글했다. 이런 사회제도 하에서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백성들의 삶이 나아질 리 만무했다. 그래도 백성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타고난 운명으로 여기며 순종하고 있었다.

정덕헌이 조선 팔도를 주유하고 도화동으로 돌아와 시작한 것이 아버지 정 진사가 열었던 서당을 이어받아 고을민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덕헌은 아버지 정 진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서당을 열었다. 아버지 정 진사는 완고한 선비로 반상 구분이 엄격했다. 그래서 고을의 양반집 자제들만 모아 공부를 가르쳤다. 정덕헌은 서당 이름부터 낙민재로 내걸었다. 백성들을 즐겁게 하는 집이라는 의미였다. 낙민재에는 상반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 배우려는 사람들이라면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정덕헌은 낙민재에서 고을민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들의 굳어진 생각과 관습을 깨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사람은 모두가 평등하다네. 그러니 반상을 구분하여 차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네.”

“양반과 상놈 구분이 엄연한데 어떻게 똑같단 말인가유?”

“그러게, 반상이 같다는 것은 마소가 같다는 거여!”

“이보시게들, 이젠 세상이 달라지고 있네. 머지않아 반상도 없어지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올 걸세. 그러나 그런 세상은 가만히 있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네. 아무리 양반이라 해도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시정을 요구해야 하는 것이네.”

정덕헌은 백성들 스스로 종속된 봉건 관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고을민들에게 설파했다.

“우리같이 천한 것들이 누구한테 뭘 요구한단 말인갑쇼?”

“억울헌 일을 당하면 고을원이라도 찾아가 자꾸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네.”

“우리 같은 것들 하소연이나 들어줄 정도로 원님이 그렇게 한가허시대유?”

“그러게 말여!”

“참으로 답답하신 서방님이시우. 그건 서방님 같은 양반님네들이나 하는 거지, 우리같이 상놈들이 그랬다가는 볼기짝이 백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거구먼유.”

“맞어유. 타고나길 상놈으로 났는 데, 양반님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당연하지유.”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일세! 그러니 평생 남 종살이이나 하는 걸세. 상민이라고 무조건 참아오던 것들, 이제는 바꿔야 한다는 말일세. 그게 비록 고을 원이고, 나랏님이라고 하더라도 잘못한 일이면 고치도록 당당하게 일어서야 한다는 말일세!”

“그런 세상이 워디 있대유? 금수 진배 없는 우리 같은 것들이 언감생심 양반님들한테 대들다니요? 아서시유!”

“그러다 양반님네들한테 맞아 죽으면, 두 눈 벌겋게 뜨고 지만 쳐다보고 있는 식솔들은 누가 먹여 살리구유? 서방님, 당최 그런 말씀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시우!”

“그건 서방님처럼 먹고살 걱정 없는 양반님네나 하는 소리고, 지들같이 온종일 꿈적거려도 굶기를 양반님네들 밥 먹듯 하는 상것들이 뭘 어쩌겠습니까요? 괜스레 나섰다가 멍석말이나 당해 골병들면 꿈적거리기만 더 힘들 뿐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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