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헌이 처음부터 반골 기질을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던 정덕헌은 순조 연간에 약관의 나이로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지만, 낙방만 거듭했다. 과거는 나라 인사제도의 기본이요, 선비들이 공부하여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김씨 세도정권은 전횡을 일삼으며 갖은 비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과거시험에서 부정이 난무했다. 시험을 대리로 치르고, 뒷돈으로 합격자를 남발하고, 뇌물로 관직을 매매하는 엽관이 횡횡하는 똥구덩이 같은 세상에서 편법을 모르는 정덕헌이 과거시험마다 낙방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덕헌의 아버지 정 진사 또한 일찍이 정조 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를 지냈다. 하지만 정 진사는 정조 사후 수렴첨정과 외척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역겹다며 벼슬길을 마다하고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치며 새 세상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덕헌 또한 외척의 득세로 벼슬길에는 들어서지도 못한 것이 가슴에 한이 되어 서책을 멀리하고 한동안 방황을 거듭했다. 무뢰배들과 어울려 장마당을 떠돌며 행패를 부리고, 투전판에서 남의 등을 치고, 주막을 전전하며 주색잡기를 일삼았다. 사대부 가문의 자손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할 온갖 추태를 저지르며 다녔다. 정덕헌의 본바탕을 익히 알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그를 험담하기보다는 비틀어진 세상을 원망했다. 아버지 정 진사 또한 아들의 그런 행태를 번연하게 알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정덕헌을 불렀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려느냐?”

“이런 세상에 제가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너는 이제껏 무슨 공부를 어찌 하였느냐?”

“그까짓 공부가 무슨 소용입니까?”

“공부가 너의 일신상 명리만을 위한 것이었더냐?”

“소자도 제 일신만의 입신양명을 위해 공부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공부를 통해 깨치고, 그 깨친 뜻을 널리 세상에 알려 사람들을 좀 더 잘 살게 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아갈 방법이 없는 데 그깟 공부를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차라리 이렇게 하루하루 세월을 보내며 사는 것이 나을 듯싶습니다.”

“그래, 그렇게 살아보니 뭐가 보이더냐?”

“그 뭐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더러운 세상 욕이나 하며 이렇게 살렵니다.”

“어리석은 놈!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뜻을 세워 입신양명하는 것이 어찌 조정에 나아가는 길만 있겠느냐?”

“썩은 세상을 고치려면 그 길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런데 조정이 몽땅 썩을 대로 썩었으니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세상을 원망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 때를 기다리는 것도 장부가 지녀야 할 덕목이니라.”

“때를 기다리다니요?”

“세상이 무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시절마다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니라. 사람이 그 순리를 거스르기 때문에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지금은 어느 때입니까?”

“음이다.”

“그러면 음처럼 살아야 합니까?”

“음과 양의 구분이 있더냐? 해가 너무 밝아 달이 보이지 않을 뿐 하늘에 달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지금은 음이 강해 양이 보이지 않을 뿐, 음 안에 양이 있는 법이다. 음이 지배를 하니 세상 모든 것이 음처럼 보이겠지만, 언젠가는 그 양이 자라 음을 지배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사람이 선함을 알면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고, 악행을 알면 선행을 베풀 수 있는 법이다. 악행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어찌 선행을 베풀려고 하느냐. 왜 그런 세상 이치를 모르고 한 쪽만 보는 것이냐? 너는 그것을 찾아보도록 하거라!”

그날 이후 정덕헌은 집을 떠나 수년을 주유천하했다. 그가 벼슬길을 단념하고 세상을 떠돌며 본 것은 조선 땅 어느 곳으로 발길을 옮겨도 관리들의 부패로 아수라장이 된 백성들의 파탄 난 삶뿐이었다. 백성들은 살아있어도 산목숨이 아니었다. 하루하루를 연명한다는 표현도 사치스러울 지경이었다. 조정의 고관대작이나 지방의 외관 말직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한결같이 뜯어먹는 대상은 죽지 못해 사는 백성들을 향해 있었다. 그들은 외척의 세도가들에게 아부하여 매관매직한 감투를 내세워 바친 본전을 뽑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다. 관직에 있으면서 돈을 벌지 못하면 칠푼이란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아예 녹봉이 없는 지방 관아 이방이나 호방의 악행은 목불인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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