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숙 수필가

새벽, 산에 접어든다. 푸르스름한 빛에 잠긴 산길이 유난히 호젓해 보인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춘다.

‘묻지마 살인’이 수락산과 사패산에서 있었다. 아무런 원한도 없는 생면부지의 여성을 단지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잔인하게 폭행하고 죽였다 한다. 그 뉴스를 접한 친정엄마가 단박 전화하셨다. 새벽 산행 절대 하지 마라. 평소 품고 계셨던 걱정까지 보태 지청구가 더 늘어났다. 허리가 아파 동행 못 하는 남편도 당분간 자락길만 돌고 오란다. 망설이다 나선 길, 크게 기지개를 켜고 헛기침을 하며 용기를 낸다.

산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갑자기 툭, 튀어나올 것만 같다. 오늘따라 까마귀가 떼도 날아다니며 극성스럽게 짖어댄다. 매일 오르던 길인데 낯설고 살풍경하게 보인다. 사람을 만나도 무섭고, 아무도 안 보여도 걱정, 두려움이 발목을 잡는다.

돌이켜보니 산행을 시작한지도 어언 20여 년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저혈압으로 늘 머리가 천근만근 무거웠던 나는 ‘이러다 머리를 받치고 다녀야 하는 게 아닐까?’ 하던 때가 있었다. 백약이 무효였다. 그때 남편이 북한산으로 나를 이끌었다. 평소 산행을 달갑게 여기지 않던 나는 툴툴거리며 그를 따라 다녔다. 숨이 턱에 차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그때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머리를 휙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머릿속이 맑게 개는 것이 아닌가? 그 후 만사를 제치고 산에 올랐다. 이젠 남편을 능가하는 산 마니아가 되었다. 그런 나에게 남편은 ‘머릿속의 바람’이란 아메리카 인디언식의 닉네임을 지어 주었다.

근심이 몰아칠 때면 나도 모르게 산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시부모님의 병환이 깊어지자 시누이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어제까지 흉허물없이 지냈던 그녀들이 하루 아침에 어찌 이리 돌변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서운했다. 산을 오르며 나는 점점 더 깊은 슬픔에 빠져들었다. 힘없이 하산하는데 난데없는 음성이 들렸다. “칭찬받으려고 부모님 모신게 아니잖아! 무슨 생각이 그리 많노!”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시치미 뚝 떼고 있는 산! 그렁그렁한 눈에 정겹게 다가왔다. 그 후 산을 오르며 때때로 주저리주저리 하소연하는 버릇이 생겼다. 답은 늘 마음속에 있었다. 그저 묵묵히 귀 기울여주고 두 팔 벌려 감싸주는 넓은 품. 그가 아침마다 나를 깨우고, 나를 부르고 있다.

“야호!”

언제나 ‘야호’ 하고 인사를 하는 아주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반긴다. ‘야호 아주머니’를 산 중턱에서 만났으니 지금 시각은 6시 반일 것이다. 철학자 칸트가 따로 없다. 안녕하세요? 나도 따라 인사한다. 오늘따라 더 씩씩해 보인다.

요즘 들어 혼자서 산행을 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단다. 그래서인지 내가 다니는 코스에도 홀로 오는 아주머니들이 많아졌다. 산모퉁이마다 불쑥불쑥 낯익은 모습이 나타난다. 모두 무사하다! 불안한 기색들이 역력하지만 서로 환하게 인사를 한다. 졸아들었던 마음이 서서히 풀린다.

예전에는 산에서 노숙자를 만나곤 했다. 동굴에 살고 있던 그는 여름에도 두껍고 더러운 옷을 껴입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그가 다 떨어진 운동화를 신고 지나가면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는 그림자처럼 휙 나타났다가 묵묵히 사라지곤 했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그가 얼어 죽었을까 봐 걱정했다. 어느 날부터인지 보이지 않아 시원섭섭한 느낌이었는데 노상에서 마주치자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하마터면 아는 척 할 뻔했다. 그는 그저 불쌍한 부랑자였고 그렇게 산에서 사는 것을 묵인했던 세월도 있었다. 아무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험하게 살망정 사람 해코지 않는다는 믿음을 암암리에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폭발하면 제어가 안 된다는 분노증후군이 신성한 산에까지 스며들고 있다. 나의 안식처를 지키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된다.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했다. 공자님 말씀이 나를 다독인다.

천천히 산을 오른다. 새들이 저마다 음색을 뽐내며 뾰로롱 날아다닌다. 가슴을 관통하는 딱따구리의 공명을 한참 서서 듣는다. 멈춘 나를 향해 나무들이 훌훌 바람을 보낸다. 햇빛을 받아들인 바위가 반짝 빛을 내뿜는다. 이 모든 것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산은 그저 무심한 표정이다. 나는 훌훌히 나만 데리고 걷고 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따지고 보면 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닌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걱정은 내려놓고 자유롭게 살기로 한다. ‘머릿속의 바람’이 가동하기 시작한다. 나의 산은 오늘도 변함없이 맑음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