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철 아동문학가

나이가 들어서 일까? 눈 주위가 가끔씩 파르르 떨린다. 손으로 살살 문지르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보기도 하지만 그 때뿐이다. 그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얼마 전부터는 눈의 피로감을 쉽게 느껴 의식적으로 창밖을 쳐다본다. 유리 하나를 경계로 한 세상은 완전히 딴판이다. 연구실 안은 칙칙한 책으로 쌓여 있지만, 밖은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있다. 연구실이 있는 4층 높이의 은행나무는 어느 사이 노란 물감으로 덧칠까지 해 이제는 보기만 해도 눈이 시리다.

이 때가 되면 나를 찾는 우편물 중에는 결혼 청첩장과 함께 음악회를 알리는 초대장이 자주 눈에 띤다. 전문 연주자로 구성된 음악회도 있지만 동호인들이 모여서 무더운 여름 내내 연습한 곡을 대중에게 선보이는 음악회도 있어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음악회 초대장을 보노라면 “어어, 이 분이 이런 면이 있었어. 의외인데”하기도 하고 “야, 대단하시네. 그 연세에 연미복을 입고 무대에 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셨을까”하며 나 혼자 감탄과 함께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지난 주일에는 필자도 잠시 단원으로 활동했던 합창단의 정기 연주회가 있어서 참석해 보았다. 아직 합창단원이 많지 않아 합창의 웅장함은 기대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온 정성을 다해 연주하는 대원들 한 분 한 분의 숨소리가 객석까지 그대로 들려 공감의 효과는 컸다. 마침 예쁜 예비 며느리도 단원으로 연주를 하게 되어 아들과 함께 참석해 잠시지만 따스한 선율에 온 몸을 맡기는 호사도 누렸다.

합창단이나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연주를 하려면 무엇보다도 악보에 충실해야 한다. 리듬은 물론 박자나 쉼표까지도 작곡자의 의도대로 정확히 연주를 할 때 그 곡이 살아서 청중을 감동시킨다. 아무리 목소리가 좋고, 악기의 성능이 좋아도 자기 마음대로 노래하고 연주한다면 그것은 소음에 불과하다. 소프라노의 고음이 필요할 때에는 소프라노가. 베이스의 저음이 필요할 때가 있으며 베이스가 각자 자기 역할을 다 할 때 올바른 음악이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하나의 음악회라고 본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각자의 악기를 가지고 와서 다양한 음색으로 연주하기도 한다. 그 때 악보를 무시하고 자

자기 감정대로 연주를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아마 뒤죽박죽 음악회가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악보는 헌법을 기초로 한 수많은 법률과 예부터 내려오는 관습, 도덕, 윤리 등이 아닐까 한다. 아름다운 곡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이런 규칙들을 잘 지켜야 한다. 내가 더 부르고 싶다고 쉼표를 지키지 않고 계속 연주한다면, 또 팔분음표를 이분음표로 생각하고 연주한다면 연주곡은 아름다운 조화가 아니라 불협화음을 이루게 되어 청중은 귀를 막는다.

작금의 혼란한 정국을 보며 지휘자도 악보도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비록 세련된 기교나 훌륭한 악기는 없었지만 온 정성을 다하여 악보대로 지휘하고 연주하던 옛날의 지휘자들이 생각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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