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시인 충북예술고 교사

십 몇 년 전에 활터에서 겪은 일입니다. 해마다 입춘이 되면 집집마다 입춘방을 붙입니다. 가장 많이 쓰이는 문구는 ‘입춘대길 건양다경’입니다. 이것을 어느 분이 붓글씨로 써서 여닫이문에 붙여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한 사람은 가져다가 집에 붙이라고 손수 붓글씨로 쓴 입춘방을 책상에 수북이 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무사님(활터에서는 여자 궁사를 ‘여무사’라고 부름)이 그걸 보고는 혼잣말로, ‘저런 거 미신 아닌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심코 그 옆에 섰다가 들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다 못해 앞이 아득해졌습니다. 수 천 년 이어온 전통을 미신이 아닌가 의심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도깨비, 솟대, 금줄, 두레, 미륵, 광대, 서낭당, 성주, 터주 이런 것들은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우리 생활에서는 빼려야 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런 것을 아는 사람조차도 많지 않습니다. 이미 생활의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상생활을 지배하던 이런 것들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대부분 알 수 없는 비밀스런 것입니다. 그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 민속학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대부분 우리의 상식이나 논리로는 알 수 없는 깊은 세계와 연관이 되었습니다. 예컨대 매년 해가 바뀌면 동네마다 지신밟기를 하죠. 풍물패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액운을 물리친다고 한바탕 풍물을 울리며 놀아주는 것입니다. 개화된 신문명의 시각으로 보면 색동옷 입고 미친 짓을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이 ‘짓’이 엄청 훌륭한 과학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분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자기네 동네에 살짝 미친 노인이 한 분 살았는데 이 분은 틈만 나면 논으로 나가서 징을 쳐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분은 농약을 치지 않는데도 벼가 병충해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벼멸구가 징소리를 들으면 심장마비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죽거나 기절해 맥을 못 추는 것이죠. 우리 같은 사람도 징이나 북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쿵쿵 뛰잖습니까?

그러면 해마다 새해 벽두에 지신밟기를 하는 이유가 아주 또렷해집니다. 한바탕 징이며 꽹과리 북을 쳐대면 집안에 있던 미생물들이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소리의 강약과 파동이 악기마다 다를 것이니, 징소리에 약한 벼멸구처럼 각종 미생물들은 풍물패의 소리에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신밟기는 미생물의 존재가 아직 밝혀지기 이전의 옛 시절에 그런 행위를 하면 미생물로 인한 재해가 훨씬 덜 발생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감지한 옛 사람들의 지혜이자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미신이라고 비웃으며 그런 문화를 천시해 마침내 사라지게 한 오늘날의 우리야말로 ‘과학이라는 미신’에 빠진 것은 아닌지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잊혀져가는 것들을 돌아보면 우리 자신의 모습이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 책은 잊혀진 우리 것을 돌아보면서 우리 문화 전반에 대한 것을 살펴본 책입니다. 그러려니 하고 여겨왔던 것들을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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