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승의 자잘한 세상이야기]세중리에 갔다가
[정연승의 자잘한 세상이야기]세중리에 갔다가
  • 충청매일
  • 승인 2016.04.19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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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충북작가회의 회장

 

자료사진 몇 컷이 필요해 보은군 마로면 세중리로 향했다. 마로면까지는 잘 갔지만, 그 다음부터 문제가 생겼다. 세중리로 가는 길을 알려줘야 할 핸드폰이 엉뚱한 방향을 가리켰다. 초행길이기는 했지만 지도를 보면 대강의 방향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정반대로 길 안내를 했다. 삼십 여분을 헤맨 끝에 저도 미안했는지 핸드폰은 먹통이 되었다. 결국 지구대로 갔다. 경찰관은 여기서 설명하기 복잡하니 마로면으로 가서 다시 물어보란다. 무책임한 핸드폰에게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렇다고 핸드폰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마로면에 들어서자 차부인 듯한 길가 나무의자에 안노인 서너 명이 앉아있었다. 차를 멈추고 길을 물었다. 그런데 그중 한 노인이 일어나더니 다짜고짜 뒷문을 열고 올라탔다. 그러더니 자기가 알려줄 테니 출발하란다. 무뢰한 행동에 어의도 없고 적이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노인을 내리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출발을 했다. 세중리에 사느냐고 여쭈었더니 아니란다. 세중리에 살지도 않으면서 길을 알려준다는 할머니 말에 의문이 들었다. 그러니 어쩌랴. 세중리로 가는 길은 갈림길이 많아 복잡했다. 할머니는 그때마다 뒤에서 왼손 편으로, 오른손 편으로 하며 길안내를 했다.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무진 고생을 했을 것이 분명했다. 할머니는 기계도 모르는 소로까지 환하게 꿰고 있었다. 구시대 할머니가 첨단기계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세중리에 도착하자 할머니가 한사코 내리시겠단다. 그래서 댁이 여기냐고 했더니, 저 윗마을인데 잠깐이면 걸어갈 수 있단다. ‘남의 일을 봐주려면 삼 년 상까지 봐주라’고,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제 볼일 끝났다고 안면몰수하고 모른척한다면 사냥 끝났다고 개를 삶는 후안무치나 뭐가 다르겠는가. 차를 몰았다. 할머니는 뒷좌석에서 일어나다시피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 하셨다. 몇 번이나 손사래를 치며 내려달라고 재촉하셨다. 할머니 댁은 세중리에서도 십리가 넘는 길이었다. 할머니 걸음으로는 두 시간은 족히 걸어야 할 거리였다. 그런데도 걸어가겠다고 하신 할머니의 그 마음이 가슴에 와 닿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사람들의 염치였다. 세상에서 염치가 사라져버렸다. 요즘 세태가 그러하다. 사람들이 체면을 차릴 줄 모른다.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그저 자기 욕심만 차리면 모든 것을 허깨비처럼 버린다. 더 무서운 것은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그것이 왜 부끄러운 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부모를 죽이고, 자식을 죽이는 패륜을 저지르고도 뻔뻔스럽다. 잡힌 것이 억울할 뿐이다. 그리고 법대로 죗값을 치루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인륜을 먼저 가르치지 않고 법을 우선시하는 교육의 문제다. 그러니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핸드폰처럼 잘못된 길을 알려주고도 반성하거나 전혀 모르는 척 하는 뻔뻔한 요즘 사람들보다 시골 벽지 세중리에서 만난 염치 아는 할머니께 배운 것이 크다. 초행의 길손에게 길을 알려주고도 자신의 할 일이 끝났으니 갈 길이 먼대도 굳이 내리려는 할머니의 마음 씀씀이가 더 고맙기만 했다. 할머니를 내려드리고 되돌아 내려오는 길이 전혀 멀지 않았다. 오늘은 종일 따뜻한 하루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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