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 칼럼] 묵향(墨香) 그윽한 붓길을 찾아
[이정식 칼럼] 묵향(墨香) 그윽한 붓길을 찾아
  • 충청매일
  • 승인 2016.03.20 17: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 충주농고 교장 수필가

말은 마음의 소리(心聲)요, 글씨는 마음의 그림(心畵)라 한다. 붓을 들고 운필(運筆)을 할 때 마음이 불안하면 붓끝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지지 않는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가슴속에 고아(高雅)한 뜻이 없으면 글씨가 잘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조선후기 추사(秋史) 김정호 선생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에서 문자의 향기를 받고 책의기운을 받으며 사는 것이 글씨의 경지에 이르는 길이라 했다(書卷氣文字香). 추사는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으며 깊은 고뇌 끝에 남기고간 자형(字形)은 그의 비석에서 찾아낸 것이 유명한 추사체다. 예부터 동양 삼국은 한자가 뿌리 깊게 내려 고대중국의 갑골문(胛骨), 석고문(石鼓), 고구려 광개토왕비 등에서 선인들의 지혜와 정교한 서체(書體)를 찾아내 그 미적 가치를 추구해온 것이 한자 오체로 변천해온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이 한자(漢字)는 우리생활에 쓰지 않으면 안될 만큼 길들여져 왔지만 우리말을 묘사하기에는 어렵고 불편함이 컸다. 이에 세종대왕께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시어 한글을 창제하셨다. 당시 한학에 심취(心醉)한 선비들은 한글을 천민의 글, 언문(諺文)이라해 사용하지 않았다. 급기야 궁중에 궁녀들에 의해 쓰여진 궁체(宮體)의 미적 가치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한글 서예는 궁체에서 흘림, 고체, 민체, 팔본체 등 다양하게 변모하면서 한글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궁녀들은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들이 갖추어야 할 몸가짐에서 한글궁체가 비롯됐다는 것은 그 배경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궁체는 조선중기 숙종 때 정착됐으며 섬세하고 유려(流麗)한 점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한글사용의 학대 속에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주고받던 편지글이 서민들의 애환이 깃든 글체라고 최근 이 민체(民體)가 호감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궁체일변도의 한글서체에 새로운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래서 궁체 흘림 팔본체 등을 써오다 요즘에 민체를 열심히 쓰고 있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모든 것을 컴퓨터에 의존하는 현실에서 모필(毛筆) 글씨를 쓰는 것은 시대착오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붓글씨를 쓰임새로만 보는 이해부족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 금전만능의 가치관은 자기중심적 이기주의로 치닫고 그것이 핵가족중심 사회로 변하면서 선악을 구별 못하는 패륜의 부도덕한 일들이 인간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지 않는가. 100세 시대 고령화로 급변하는 현실에서 여가선용을 위한 가치관은 아름다운 마음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최근 서도 열이 높아만 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닌가싶다. 묵향의 붓 길이 노년 인생의 길이라 여기며 오늘도 붓을 들고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써본다.

‘먹을 가는 것은 곧 내 마음을 닦는 진(眞)의 길이요, 그 먹물로 글씨를 쓰는 것은 내 삶을 아름답게 하는 미(美)의 길이요, 쓰고 난 붓을 씻는 것은 때 묻은 내 마음을 정결히 하는 선(善)의 길이다. 성현의 얼이 깃든 묵향(墨香) 그윽한 붓 길에 정성을 다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을 더욱 행복하게 하는 길이 되리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