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별로 살펴본 브래지어의 변천사 -

명칭도 많고 종류도 다양한 여성의 속옷. 겉옷 이상으로 속옷에 대한 관심사는 여성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신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코르셋으로 몸을 구속했던 중세와 여성해방의 상징으로 브래지어를 불태웠던 현대사까지, 문화라는 커다란 흐름 속에 시대마다 그 기능과 형태, 목적을 달리했던 브래지어의 역사를 살펴보자. / 편집자

△그리스 로마

옷에 재단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인 그리스 로마 시대.
커다란 천을 몸에 둘둘 말고 유유자적 다녔을 것만 같은 그 시절에도 ‘가슴받이’ 라는 게 있었다.
비록 기다란 천으로 처진 가슴과 아랫배를 단단히 고정시키는 수준이었지만 날씬한 몸에 대한 열망은 그 시대에도 여전했던 모양이다.
가슴을 커 보이게 하는 방법도 당연히 있었다. 천을 여러 겹 덧대어 불룩해 보이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겠지만 지중해 날씨에 몇 겹의 천을 감고 다닌다는 건 생각만 해도 겨드랑이에서 땀이 차오르는 일이다.
그럼 과연 어떻게 했을까. 그리스 로마 복장의 특징인 드레이퍼리(천조각이 늘어지면서 만들어내는 느슨한 주름). 이것을 가슴 부분에 모아 볼륨을 넣었다니 지금 생각해도 꽤 센스가 있었다.

△중세

중세와 근세엔 엄밀한 의미의 브래지어가 없었다.
대신 가슴 아래부터 허리까지를 옥죄어 상대적으로 가슴을 보정하는 코르셋이 있다.
13∼14세기, 옷이 점점 몸의 실루엣을 따라 재단되기 시작하면서 프릴이나 레이스를 달아 화려하게 장식한 언더드레스(cotte) 위에 오버드레스를 입고 절개선 사이로 화려한 언더드레스를 드러내는 형식의 옷이 출현했다. 마치 신데렐라나 백설공주의 무도회 드레스처럼.
당시 남자나 여자 모두 허리를 좁고 가늘어 보이게 하는 스테이스(stays)를 입었는데 이것을 코르셋의 초기 단계로 본다.
15∼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며 옷은 점점 더 장식화됐다.
지금까지는 슬래쉬에 대체적으로 길게 늘어뜨리던 형식이 옆으로 부풀어졌다.
치마는 보조대를 세워가면서라도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부풀리고 ㅅ자 모양으로 걷어올려진 스커트 사이로 화려한 페트코트가 드러났다.
17세기 후반,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은 유행의 근원지. 그곳의 에티켓은 곧 유럽 궁정의 표본이었고 그곳에서 유행하던 양식은 전 유럽이 서둘러 따라잡아야 할 최신 유행 모드였다.
프랑스 산업체들은 이때부터 빌로드, 비단, 레이스 등을 체계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파리에서는 매달 한번씩 최신 유행복을 입은 마네킨이 런던, 이탈리아, 러시아 등지로 보내졌다.

△근대에서 현대까지

19C 말엽부터 엉덩이 부분을 강조한 버슬스타일이 나타났다.
인상주의 학파의 그림에도 수시로 등장하는 이 스타일은 점점 S자형으로 단순해졌으며, 이 시기 브래지어의 모체인 볼스터가 등장했고 이어 바스트 임프로버라고 하는 철사나 셀룰로이드로 유방의 형태를 따라 캡모양으로 만든 형태가 등장했다.
드디어 1916년, 어깨끈이 붙은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브래지어가 탄생하게 됐다.
브래지어가 전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킨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상황이 여성의 사회 진출을 촉발하면서 복장도 점점 일하기 간편한 복장으로 바뀌어갔다. 현란한 드레스를 보정하는데 이용되던 코르셋은 허리 아랫부분으로 줄어들었고 가슴만 커버하는 브래지어와 엉덩이와 허리를 커버하는 거들이 나눠졌다. 미국의 내의전문회사들은 서너 개의 어깨끈을 응용해 다양한 네크라인을 연출한 제품을 내놓았으며 점차 고무에 섬유를 입힌 브래지어로 신축성과 착용감이 뛰어난 제품을 출시했다.
1958년 듀폰사에서 개발한 신소재 라이크라는 보정 속옷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리타 헤이워드, 마릴린 먼로 같은 은막의 여배우들이 착용한 속옷 광고는 화장품, 스타킹, 향수 등과 함께 여성에 대한 성적 이미지를 맘껏 충족시켜 주는 매개물이 되었다. 이런 속옷이 60∼70년대 자연스런 실루엣의 유행과 함께 자수나 레이스 브래지어 등 점점 더 가볍고 실루엣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발전되다가 1970년대에 미니스커트와 유니섹스 패션이 출현하면서부터는 전체적으로 퇴조기를 맞게 된다.
심지어는 남녀평등 의식의 고양으로 일부 급진적인 젊은이 사이에서는 노 브라(no-bra)를 주장하며 여성의 상징인 브래지어를 공공연히 태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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