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양덕리 인물 ‘이이첨의 지견’

▲ 양덕리 마을 입구에는 마이산이나 미호천 발원지 마우정을 가리키는 안내 표지판이 없어 초행길인 사람들은 마을사람들을 찾아 물어야 한다.

미호천 발원지 안내 시설 없어 아쉬움으로

양덕리서 찾아볼 수 없는 이이첨 관련 흔적

 

미호천 발원지 마이산 아래 첫 마을 양덕리에 들어서면 마이산으로 오르는 길과 발원지인 마우정을 설명하는 안내 표지판이 없다. 초행길인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을 찾아 물어물어 올라가야 한다. 다행히 우리 일행은 미호천지킴이 임한빈씨의 길안내로 헤매지 않고 길을 쉽게 찾아 올라갈 수 있었다. 마이산 답사를 마치고 양덕리로 내려왔을 때 가장 아쉬운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미호천 물길의 근원지가 되는 마이산이나 마우정의 가치가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그 혜택을 보고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은 그것의 가치를 잊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 마을이장 김용선씨는 “마이산으로 오르는 길에 관해서는 그동안 음성산악회 회원들이 맡아 해주었다. 미호천 발원지가 마우정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안내표지판을 설치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앞으로 관심을 갖고 마을 주민들과 논의해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영농철인지라 마을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려웠지만 마을 회관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새끼들을 돌보고 있는 제비를 만날 수 있었다. 제비를 구경하다 오래전 마을이장을 지냈다는 주민 신상순(78)씨를 만나 이런저런 양덕리의 소회를 들어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지만 이 마을에서 험한 꼴은 보지 못했어. 평온한 편이었지. 6·25때는 마이산이 피난지였어. 그 덕에 사람들이 무탈하게 잘 지냈지. 안타까운 것은 내가 이장을 볼 시절만 해도 세대수가 백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어. 지금은 너무 많이 줄었지. 양덕리의 인물이라면 누가 뭐래도 이이첨을 들 수 있지”

조선시대 선조와 광해군을 거치면서 역사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던 이이첨(李爾瞻)(1560~1623)이 이곳 양덕리 출생이다. 조선 중기 대북파의 영수로서 인조반정 등의 사화로 부침을 거듭했던 이이첨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이이첨이 소북파를 억누르고 십여 년의 세도를 누리던 말년 1622년(광해군 14) 어느 여름날이었다. 이이첨의 아들들이 장안에 유명한 맹인 점쟁이가 있다 하여 불러서 아버지의 앞날을 점치게 했는데 “계해년(1623년) 3월이 되면 반드시 흉한 꼴을 보겠다”했다는 것이다.

이이첨의 아들들이 노발대발하며 맹인 점쟁이의 옷과 갓을 찢고 욕을 하며 때려서 집 밖으로 쫓아냈다. 마침 공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이이첨이 피투성이가 되어 쫓겨 가는 맹인 점쟁이를 보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 맹인 점쟁이가 울면서 사연을 말하자, 이이첨은 갖은 물품으로 후히 대접하고 또 사과하여 달랜 뒤 하인을 딸려 집까지 잘 보내 주었다. 그러고는 아들들을 불러서 크게 꾸지람을 하였다.

“내가 영화가 넘치고 죄가 많아서 스스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아는데, 어찌 맹인의 점치는 말을 기다리겠느냐. 너희들이 물으니 맹인은 사실대로 대답한 것뿐인데 무엇이 죄 될 것이 있다고 매질을 해서 길에 다니는 사람들까지 놀라게 하느냐. 내가 너희들 아버지가 되었으니 이 일만으로도 더욱 죽어 마땅하구나.”

이렇게 말한 이이첨은 이일로 여러 날이 지나도록 불쾌해했다. 다음해 점쟁이의 말대로 이이첨은 광해군이 폐위되는 인조반정으로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다.

이이첨은 1593년(선조 26) 광릉참봉에 제수되고 1599년 이조좌랑, 성균관전적 등을 거칠 만큼 실력을 인정받는 인재였다. 임진왜란 중에 광릉참봉이었던 이이첨은 세조의 영정을 받들어 끝까지 보존해냈다. 그는 변란 처음부터 피난할 생각을 하지 않고 의병을 모아 늘 군막에 있어 사람들이 이이첨을 의롭게 여겼다.

선조 말년에 영창대군을 받드는 소북파에 맞서 광해군의 옹립을 주장하다가 1608년 유배당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의 수제자가 되어 조식(曺植)의 학통을 전수하고 사액 서원을 건립하였다. 이이첨은 소북 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토역론(討逆論)을 주장했고, 영창대군이 죽자 폐모론을 주도하여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정인홍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행하였으나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빌미가 되었다.

1623년 반정이 일어나자 식솔을 이끌고 도망가다가 붙잡혔다. 이이첨은 한찬남, 백대형, 정조, 윤인, 이위경 등과 함께 형을 받았으며, 이원엽, 이홍엽, 이익엽 등 세 아들도 참형되었다.

이이첨 등이 참형을 당하자 도성 사람들이 이이첨의 시체를 난도질해 시체가 온전한 데가 없었다고 한다.

맹인 점쟁이의 예언대로 이이첨의 말년이 불우하게 끝났지만 그의 일생에 대한 선과 악의 평가는 누구도 섣불리 내릴 수 없다. 역사가 말해주듯 현재 양덕리에는 이이첨과 관련된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단지 전설처럼 ‘이이첨의 지견’만이 전해질 뿐이다. 신노인의 말을 뒤로 하며 우리 일행은 미호천의 물길을 따라 덕정저수지 마이제 낚시터(모란저수지라고도 불림)로 향했다.

김정애기자(취재지원 미호천 지킴이 전숙자·임한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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