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다섯째날, 오래된 추억의 물건을 삽니다(평택~천안)

▲ 지방 하천길에 버드나무인지, 오래된 고목나무가 정말 아름다웠다. 하천을 건너는 다리 바로 옆에 서 있길래 나무를 보면서 조금만 서 있다가 다리를 건너기로 했다. 굳!

기차를 보며 시작한 추억의 산책

길가에 버려진 책마저 정겹다

과거를 한 단어로 표현할 만한

것이 있다면 괜찮은 날들을 보낸 것

 

◇제제의 오랜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평택에 도착해 본 영화를 뒤로하고 아침길을 나섰다. 하루의 아침은 늘 즐겁다.

이 날도 어김없이 신나게 길을 걷는다. 지도가 안내하는 길은 항상 차들이 즐비했다. 지도에 있는 다른 길들을 시도하는 것도 좋아 기차가 지나가는 길 쪽을 따라 천안으로 가게 되었다. 너무 신난 나머지 혼자 길에서 동영상도 찍어보았다. ‘칙칙 폭폭’ 기차소리가 이렇게 리듬감이 있을 줄이야. 어렸을 때는 기차소리가 너무도 좋아 기차여행을 하자고 부모님을 졸랐던 기억이 난다. 요즘에는 빠른 게 가장 큰 우선요소가 되어 기차보다는 KTX를 애용하지만.

제제의 오랜 친구네 집에서 머물기로 한 오늘, 핑계거리 없이 천안까지 가야한다. 국도에서의 지루함은 곧 천안에 다 왔다는 마음에 설레기도 하지만 힘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하다.

길가에서 누가 내다 버린 것인지, 잃어버린 것인지 모를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세계위인전집’. 누구 집에나 한 권쯤은 있을 법한 책이다. 깨끗한 것을 보니 아마 최근에 버려진 책 같다. 회색으로 가득한 아스팔트 위에 형형색색의 책 한 권이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다.

기차에서부터 어렸을 때 읽었을 법한 책 까지, 오늘은 추억이 떠오르는 날들이다. 제제의 오래된 친구도 제제에게는 소중한 추억이겠지 하며 힘차게 걸었다.

천안에 도착할 무렵 버려진 현금인출 부스도 보였다. 버려진 부스 안에는 “오래된 추억의 물건을 삽니다”라는 문구의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웃음만 나왔다. 실없는 헛웃음이 아닌 반가운 웃음이었다. 기차와 책으로 무장한, 추억 팔이를 하는 와중에 추억을 사들인다니. 안내판을 붙인 사람은 확실히 골동품을 사들이는 사람일 것이다 하는 생각에 멀뚱히 보고 있었다.

‘오래된 추억, 삽니다’라는 세 단어를 가장 눈에 띄게 써놓았다. 버려진 부스 옆에는 아니나 다를까 골동품들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오래된 타자기, 레코드판, 전화기 등 누군가에게는 추억이었을 물건들. 골동품을 오래된 추억이라 부르는 사장님은 단연 어린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의 추억들을 안고 사는 사람치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추억을 위한 영화 ‘그 시절’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2012’ (감독 구파도)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 과거를 위한 영화다. 나는 진부한 사랑영화는 싫어한다. 빤한 내용의 남자와 여자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전개. 중간에 있는 갈등이라고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이라던가 새로워 보일 수 있는 갈등들을 집어넣고 끝은 늘 “happily ever after“인 영화들이다.

제목과 포스터를 보고 빤하겠지, 남자와 여자가 행복하게 살아가겠지, 현실적이지 않아, 라며 거부했다. 친구가 추천해 보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상투적인 빤한 사랑이야기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학창시절이라는 단어가 더 생각나는 영화다.

홍콩영화는 즐겨 보지만 대만영화는 처음이었다. 고정관념 일 수 도 있지만 대만영화는 촌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그렇지 않았다. 학창시절 남자들의 우정과 현실적인 문제들이 가슴깊이 와 닿는 영화다. 커징텅 (가진동)과 그의 친구들이 한 여학생 션자이(천옌시)를 좋아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이 유쾌하게 전개 된다. 문제아 커징텅은 모범생 션자이에게 끊임없이 고백한다. 그의 친구들도 션자이에게 자신들의 마음을 전달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친구들은 서로의 우정을 지켜간다. 서로 다른 대학을 가고 커징텅과 션자이가 함께 하며 영화가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션자이는 커징텅의 고백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추억으로만 간직한다. 그 시절의 친구들은 32살이 되어 션자이의 결혼식에서 다시 함께한다. 그 시절 그들이 공통적으로 좋아했던 션자이가 결혼하는 상대를 보고 축복을 빌어주기 위해서다. 추억의 상징으로서 션자이를 보는 그들의 모습이 좋았다. 구질구질하게 첫사랑의 결혼식을 방해하지도 않았으며 첫사랑의 남자를 욕하지도 않았다.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 했던가, 첫사랑이란 존재가 학창시절의 상징처럼 그려지는 영화가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오래된 추억의 물건을 삽니다.”

물건을 사는 것인지, 한 사람의 추억을 사는 것인지 모르겠다. 모두에게 자신의 과거를 한 단어로 표현할 만한 단어가 있다면 괜찮은 날들을 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과거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인도’가 떠오른다. 그 만큼 나의 추억은 인도로 가득 차 있다.

추억을 가지고 사는 것은 다른 날들을 살아가기에 충분한 영양분이 되어주는 것 같다. 오래된 추억의 물건을 사고 팔 수는 있어도 추억을 사고 팔 수 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 추억의 상징이 돈으로 매겨지는 것은 모순적이지만 상징은 상징일 뿐이니 사고파는 것에 있어 문제가 될 것은 없는 모양이다.

제제의 친구, 필순 이모라 부른다. 필순 이모가 차려준 밥상은 수십 년간 제제와 이모가 쌓아온 추억을 보고 먹는 것처럼 따뜻했다. 나도 이런 추억을 만들어 가야지. 발가락의 물집도 타박상을 입은 것 같은 온몸의 통증도 다 날려 버려준 필순 이모의 밥상. 먼 훗날 이 추억이 얼마나 소중할지 짐작할 수도 없다.

글·사진/안채림

(광운대 경영학& 동북아문화산업과 복수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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