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날 정월 초하루여!”

아무 걱정도 없이 언제나 싱글벙글 웃는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다. 정월 초하루가 얼마나 좋으면 그런 말이 나왔겠는가. 그러니 길일 중 길일이다.

그러나 설날도 예전과 비교하면 많이 퇴색된 느낌이다. 내 나이가 들은 까닭일까? 아니면 세태가 그렇게 변한 것일까? 예전의 설날 풍경과 지금을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격세지감 정도가 아니라 천양지차다.

지금도 어렸던 시절 고향에서의 설을 떠올리면 가슴부터 설렌다. 설날이 다가오면 근 열흘 전부터 집안이 바빠졌다. 할머니는 종일 불을 지펴 조청부터 꼬았다. 단술도 했다. 두부도 만들었다. 그러고 나면 과를 만들기 위해 갖가지 색을 내는 곡물로 튀밥을 틔워오고, 밤새 불려놓은 쌀을 이고 나가셨던 어머니는 김이 설설 나는 가래떡을 담은 대바구니를 이고 대문으로 들어오셨다. 동네 방앗간은 종일 쉬지 않고 돌아갔고 안개처럼 뽀얀 김 안에서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며 일을 했다. 동네 튀밥 집에서는 종일 대포 소리가 났다.

설을 앞둔 대목장이 열리는 날은 온갖 신기한 물건들이 장마당에 펼쳐지고 인근마을에서 한꺼번에 몰려든 장꾼들은 설빔을 준비하느라 북새통을 이뤘다. 아이들은 덩달아 마을 곳곳을 쏘다니며 그런 것들을 구경하느라 하루해가 짧았다.

설이 며칠 전으로 다가오면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집안에서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굳어진 떡가래를 썰고, 쑤어놓은 조청과 틔워두었던 튀밥을 가지고 색색의 과를 만들었다. 부꾸미와 전을 부치고 만두를 만들었다. 골목마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들은 조상님들이 먼저 드신 후에 먹어야 한다며 광으로 옮겨진 후 할머니는 자물쇠로 문을 걸어두었다. 맛있는 먹을거리들이 광속에 그득하게 쌓여있으니 차례를 지내는 설날 아침이 더욱 기다려졌다.  

드디어 그렇게도 기다리던 설날이 되면 깨우지 않아도 일찍 눈이 떠졌다. 문고리에 손이 쩍쩍 달라붙어도 마음이 들떠 하나도 춥지 않았다. 식전부터 찬물에 세수를 해도 추운 줄을 몰랐다. 그러고 나면 집안어른들을 따라 차례를 지내기 위해 대문을 나섰다. 차례의 시작은 언제나 제일 큰할아버지 댁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제일 작은할아버지 댁까지 네 곳을 거쳐야 끝이 났다. 그때쯤이면 이미 배는 부를 대로 불러 그 어떤 맛난 음식도 더는 먹을 수가 없었다. 끝으로 차례를 올리는 작은집 할머니는 그것을 언제나 서운해 하셨다. 그리고는 내년에는 다른 집에서 먼저 먹지 말고 꼭 우리 집에 와 떡국을 드시라고 신신당부를 하시곤 했다. 그랬던 작은 할머니가 보고 싶다. 아니 그 마음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다.

일주일 쯤 후면 설날이다. 이제는 더 이상 예전처럼 집에서 음식 장만도, 많은 친척들이 모여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차례를 지내지도 않는다. 단출해진 식구들조차 차례가 끝나기 무섭게 각자의 집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 그 좋은 정월 초하루 설날도 그저 요식행사가 돼버렸다. 명절이 다가와도, 명절을 지내고 나도 뭔가 허전하다.

흔히들 세상이 각박해졌다고들 한다. 그러나 세상이 각박해진 것이 아니라 각박한 사람들의 마음이 각박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이번 설날에는 풍족한 음식이나 고급스런 선물들, 그리고 두툼한 돈 봉투보다는 좀 더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설이 됐으면 하고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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