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 수필가

올해도 여지없이 수능한파가 온 나라를 꽁꽁 얼게 만든다. 16년 만에 찾아온 한파라고 하지만, 학력고사 세대인 내 기억 속 시험 날에도 따듯했던 평일보다 영하 3도로 무척 추웠던 기억이 난다. 속설에 시험 당일엔 수험생들과 가족들의 근심 걱정이 기류를 변화 시켜 기온을 떨어뜨리게 만든다는 과학적인 근거도 있다.

시험 보는 딸이 긴장해 움츠러든 마음에 찬 도시락이 탈이 날까봐 어머니는 점심시간을 맞춰 시험 보는 학교로 도시락 싸 가지고 오셨다. 따듯한 국까지 끓여 그것이 식을까 애면 글면하며 왔을 정성 덕분인지 오후시험은 한결 편히 치렀다. 그 어머니의 따듯한 도시락에 힘입어 어쨌든 나는 그해 대학에 들어갔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의 교육은 오로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에만 학교시간들이 짜여 있다. 당연히 학생들도 인생의 목표는 소위 사회에서 말하는 서열 높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시간과 공부에 혹사당하며 청춘의 시간을 보낸다.

지인의 세 아이들 중 늦둥이로 얻은 셋째 아이는 위 두 아이보다 학습 실력이 많이 떨어진다고 한다. 그 아이가 어느 날 시험공부를 하다 말고 갑자기 펑펑 울더란다.

갑작스런 울음에 놀란 부모가 아이를 달래며 자초지종을 물으니 아이는 누가 시험은 만들어서 이렇게 싫은 공부를 하게 만들었냐며 분통을 터 뜨려 실소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른 아침에 종종 아파트 승강기에서 학교 가는 아이들을 만날 때가 있다. 대부분 아이들이 허둥지둥 승강기에 오르는 것을 목격한다.

10층에서 머물다 오는 승강기속에서 고등학교 남학생이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나랑 머쓱하니 눈이 마주친다. 늦잠을 잔 아이는 겨우 머리를 감고 집안에서 말릴 새도 없이 나온 모양이다. 등교시간에 쫓긴 아이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6층 사내아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운동화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승강기 안에서 신발 끈을 매고 있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서로 마주치면 가벼운 농담과 인사를 나누곤 하는 사이다.

아침밥은 먹고 다니니?

내가 그들에게 묻는다. 소년들은 당연히 잠도 형편없이 부족한데 언감생심 아침밥까지 챙겨 먹고 학교에 다니진 않는다는 반응이다.

1층에서 승강기 문이 열리자마자 아이들은 총알같이 튀어 나가 내 시야에서 금세 사라진다. 한동안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괜히 어미의 마음으로 바라보며 추위 속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못하고 한기에 그대로 방치돼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앞선다.

학교공부만이 미래의 살길이라는 세태의 흐름은 서글프다.

살다보니 제도권 교육에서 배우는 것보다 자연이나 세상에서 몸으로 배우는 이치나 깨달음의 공부가 삶에 훨씬 더 유익할 때가 많다.

학창시절 어쩌다 부모님 꾸지람으로 성이 나면 아침밥도 거르고 도시락까지 놔 둔 채 큰 유세인양 집을 나서곤 했다. 단식투쟁이 유치하게도 내겐 대단한 권력이었다. 그 괘씸한 소행에도 방관 못하고 내 부모님은 딸의 배고픔을 자신의 아픔인양 다시 도시락을 싸가지고 학교에 오시곤 했다. 꾹꾹 눌러 담은 고봉밥이 그분들은 자식사랑의 간접 표현이었다.

낡은 자전거에 도시락을 싣고 교문 밖에서 나를 불러내던 아버지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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