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시아버지가 팬티에 똥을 싸서 그것을 도저히 빨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평소 그 친구는 음성 꽃동네에 가서 오줌 똥 싸는 와상상태의 노인을 위해 봉사를 많이 하던 친구였다. 똥묻은 팬티에 그렇게 호들갑을 떨 것 같지 않았기에 문제의 심각성을 눈치채고 현장에 도착한 나는 화장실로 먼저 가서 문제의 팬티를 아무런 감정없이 빨아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이런 일이 있을 때엔 이렇게 빨도록 하면 된다고 일러 주었다. 40대 주부가 아이 똥기저귀를 한두번 빨아본 것도 아닌데 굳이 빨래방법을 가르쳐 줄 이유가 어디있겠는가.
그걸 몰라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좀더 냉철하게 남의 일처럼 생각하게 만들어야 감정이 쌓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선 면장갑을 끼고 그 위에 다시 고무장갑을 낀다. 다음은 팬티를 집어 똥을 화장실 변기에 넣고 뒤집어 턴다. 그래도 남아 있으면 변기의 물을 한번 내린후 다시 털어낸다. 그런 다음 비벼 빨거나 세탁기에 돌린다”고 말하며 느린 동작을 재생하듯이 말해 주었다. 시댁 식구와의 관계에서 그동안 서운했거나 억울하게 쌓인 감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런 위기상황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에 더욱 이성적 힘이 필요하다.
노인부양이라고 하면 경제적 부양, 신체 및 서비스 부양, 정서적 부양의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나라 65세이상 노인인구중 50%이상이 절대빈곤에 시달리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노인은 10%미만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노인 대다수는 자녀가 일차적으로 경제적 부양을 책임질 수 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병수발 등의 신체적 부양까지 책임져야 할 시기가 오면 부양의 부담은 극치에 달하게 마련이다.
경제적 부양이 먼저 해결되고 나야 그 다음으로 노인심리를 이해하고 그들의 욕구를 들어주는 주는 등 외로움과 소외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정서적 부양을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부모 부양의 모든 책임을 장남이 져왔다. 그것이 孝라고 하는 가치관 때문에 맹목적 복종으로 받아들여졌다. 존경과 사랑을 바탕으로 부모님을 모셔야 마땅한데 효에 의해 강요되어진다면 그만큼 심리적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장남만 자식이냐 라고 반기를 들 수 밖에 없고, 장남이 아닌 자식이라면 장남도 아닌데 내가 모시고 살아야 하는가라고 반문하게 된다.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는 노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정에서 재정적인 부양의 어려움은 물론 정서적으로 지치게 마련이다.
1년 2년에 끝날 부양이 아니기 때문에 장기적인 경제 수립과 가족간의 동거수칙이 만들어지면 적어도 부양 때문에 가족파멸로 이르는 위기는 극복될 것이다.
앞에서 지적하는 똥묻은 팬티는 팬티가 더러워서가 아니라 같이 살면서 힘들었던 갈등의 감정들이 극심하게 지속되면서 ‘똥팬티’에 감정이 이입되어 가중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감정의 찌꺼기들이 똥을 더 더럽게 여기게 되고 결국 부양에 심리적 부담까지 떠안게 되는 것이다.
식습관, 생활태도, 교육관 등의 가치관이 서로 다른 세대가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부모가 보고있으니 내집안에서조차 속옷바람으로 다닐 수 없고, 부부간에 애정표현도 자유롭게 하지 못하니 더욱 정서적으로 갈증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부양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녀들에게 부담주지 않고 당당하게 살고 싶을 것이다.
자녀와의 동거를 원하는 부모의 동거수칙은 자녀부부의 사생활권을 지켜주고 각자 지나치게 잘해주려고 하지않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생활방식을 서로 인정해 주고 간섭하지 않는 일이다.
즉 한 지붕안에 별개의 두 가족이 별도로 존재함을 인정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아침식사를 꼭 같은 시간에 같은 메뉴로 한자리에서 해야만 동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양만 맞추려 하지 말고 감정을 서로 건드리지 않아야 동류의식이 생겨 오래 동거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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